역사 속 현장에서
역사 속 현장에서
  • 이 달 순수원대 명예교수 kmaeil@
  • 승인 2007.10.11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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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은 우리민족
1933년 초 관동군과 중국북부의 일본 주둔군은 더허와 만리장성부근으로 출병하였다. 일본의 중국 북부 분리정책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중국 북부 분리정책은 역사에 뿌리를 둔 것이다. 중국과 만주는 한 나라가 아니다. 우선 최근의 DNA분석이 이를 말해준다. 우리한국인은 바이칼호 주변의 브라이트족과 가까우며 중국조선족 만주족 일본이 가장 가까운 DNA로 나타났다. 한편 중국 한(漢)족은 베트남과 함께 다른 계통이다. 언어를 보면 한국은 우랄알타이-알타이계이며 중국은 지나 티벳티안 언어이다. 여진족의 만주어는 퉁구스 계통이다. 문화적 차이를 보면 청동단검, 비파형 동검이다. 이에 비해 중국은 직선형동검이다. 심양의 요령박물관, 조양시 박물관, 내몽고의 적봉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비파형동검을 중국은 최근에 숨겼다. 우리 조상들의 생활양식은 온돌문화이다. 중국의 관광객들이 수원의 민속촌에 와서 온돌구조의 우리 가옥을 신기하게 구경한다고 한다. 고인돌의 돌문화인 것이다. 2세기 만주의 대 세력은 고조선을 이은 부여국이었다. 고조선은 시베리아에서 온 곰집단과 중앙아시아를 통해서온 범의 집단이 BC 7천년 만주에 정착했던 것이다. 3세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만주의 주인이 되었고 중국과 대립하기에 이른다. 고구려가 한반도로 남하하자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고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때 고구려는 부여, 말갈, 거란, 고구려, 돌궐의 5종족이 분열하여 붕괴한다. 당은 고구려유민들을 영주로 이주시킨다. 그 곳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이 일어난다. 거란족 이진충이 난을 일으키자 말갈계 고구려군대와 순수 고구려군대들이 합세했다. 이진충이 사망하면서 측천무후의 명을 받은 이해고의 돌격을 물리친 대조영이 발해국을 세웠다. 698년이다. 말갈족과 고구려족이 주류를 이루는 고구려 계승국가이다. 발해는 러시아의 연해주까지 흡수한 만주의 해동성국이 되었다. 발해의 남진을 두려워하는 신라가 거란족과 손을 잡고 발해를 쓰러뜨린다.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916년 요(遼)나라를 세우고 태조가 되었다. 발해가 멸망하자 말갈족은 여진의 이름으로 발해의 땅에 세운 요에 거주하게 된다. 요나라의 구성인원은 거란족과 발해민인바 발해는 고구려와 말갈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 거란족과 고구려에서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니 역사의 흐름은 고구려와 발해에 이어 요에 이어진 것이다. 요에 저항하던 송화강 동부의 여진족인 아구다가 금(金)나라를 세웠는바 그 중심주류는 여진이었다. 이 여진국 역시 발해의 백성으로서 요의 지배 하에 들어갔었다. 우리는 발해는 말갈, 요는 거란, 금은 여진족의 나라고 구분하고 있는 과오를 저지르고 있다. 이 여진이 또한 청을 건국하고 여진족을 만주족이라 부르게 된 것이고 만주는 우리 땅이니 분리정책은 잘한 것이다. 만주족은 역사적으로도 우리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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