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몽고와 남북한의 평화통일
내외몽고와 남북한의 평화통일
  • 수원대 명예교수 ·계명고등학교 kmaeil
  • 승인 2008.07.29 2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월30일은 러.일협약 101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제1차 러.일협약은 그로부터 11년을 거슬러 올라가 1896년 5월26일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 그때 대관식에 참석한 일본의 야마가따가 러시아의 로마노프와 한.만교환을 제의했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할테니 러시아는 만주를 차지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부동항이 필요함으로 만주보다 한국의 38선 이북을 원해 이 제안은 무산된 것이다. 마침내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켰고 일본이 승리하면서 미국의 태프트가 일본의 가쓰라와 필리핀과 한국에서의 권익을 상호간에 보장하는 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1905년 8월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일본,미국,독일,영국,러시아가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하게 되고 그로부터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게 된다. 러.일간의 전쟁을 종결짓는 강화조약은 체결되었지만 그 결과에 대하여 불만을 갖기는 패전국 러시아뿐만 아니라 승전국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동북아 지역에서 러시아 세력을 완전히 일축하겠다는 일본의 애초의 계획은 전혀 실현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단 한 푼의 전쟁배상금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패전의 원인이 일본에 대한 힘의 열세에 있지 않고 혁명기운과 같은 불행한 국내적 상황때문이었다는 의견이 팽배하였다. 따라서 포츠머츠조약에 대한 러.일양국의 고조된 불만으로 러시아에 의한 보복전이 발생할 것인지 또는 안정적인 세력균형이 확보될 것인지 당장은 사태의 추이를 예측하기 퍽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러. 일양국정부사이에는 한국문제 송화강 항해권 문제 그리고 극동 러시아 수역 어로문제에 관한 포츠머츠조약문제 해석을 둘러싸고 이견이 크게 노출되었다. 특히 한국문제에서 러시아정부는 일본이 포츠머cm강화조약의 협의를 훨씬 뛰어넘어 한국을 보호국화하고 한국 내 러시아의 상업적 이익마저 규제하려 한다고 크게 불만이었다. 한편 일본은 전후 경영자금이 파리금융시장에 크게 의존 되었던 까닭에 프랑스정부는 이같은 상황을 적극 활용하여 러.일관계를 안정적인 힘의 균형상태로 조율할 수 있었다. 일본으로서는 전후복구를 위해 프랑스의 돈이 한시라도 급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러.일 양국정부는 1907년 2월부터 직접 대화에 들어갔다.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문제에 대칭적인 자국의 몽고문제를 들고 나왔다. 즉 몽고 및 청국변경지역에 있어서 러시아의 우월적 이익을 승인한다는 규정을 요구한 것이다. 결국 일본은 외몽고에 한정시켜 러시아의 특수이익을 인정한다는 선에서 양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타협안을 바탕으로 7월 30일 러.일협약 및 부속문서가 양국정부에 의해 조인되었다. 이것이 제1차 러.일협약인 것이다. 러시아와 일본의 접근은 비록 피상적일찌라도 “문호개방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만주진출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대항하였다. 1910년의 2차 협약에서는 만주를 양국의 이익지역으로 분할한 것이다. 1912년의 제3차협약은 몽고독립선언 뒤의 내.외몽고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은 남.북 분단의 비극을 안게 된 것이다. 이제 북한의 핵문제를 놓고 6자회담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러시아에서는 발해건국기념행사를 진행시키고 있고 중국에서는 동북공정론을 펼치면서 고구려의 역사와 동북3성의 영토를 한국으로부터 떼어 내려하고 있다. 그리고 내몽고는 티베트문제와 함께 중국의 자기주장에 몰입하고 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내년 즉 간도협약 100주년 그리고 동양평화론을 내세우며 일본의 이등박문을 쓰러뜨린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내.외몽고와 한국의 통일문제가 세계평화의 틀을 짜는 동북아질서의 핵심적인 이슈라고 보아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