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칼럼] 사라지는 집밥의 소중함
[덕암 칼럼] 사라지는 집밥의 소중함
  •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1.08.1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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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강원도 탄광촌 태백은 시커먼 연탄가루가 대기 중에 날려 하얀 빨래도 못 널고 실개천은 탄가루가 섞여 크레파스로 까만색으로 칠해야 그림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모래알도 씹을 만큼 먹성이 좋던 필자의 사춘기 시절은 당시 지금의 초등학교와 담벼락 하나 사이로 도보로 5분 거리였지만 학교 갈때면 왜 그리 멀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책가방을 마루에 집어던지고 부뚜막 위에 삼베 보자기로 덮여진 양푼에는 멸치 몇 마리 들어간 시래깃국과 정부미로 지은 밥이 전부였지만 두 그릇을 다 비우는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돌아서면 다시 배고픈 시절, 지금의 일반식당에서 나오는 공깃밥 3개 분량은 되었으리라. 어쩌다 돼지고기 두루치기나 석쇠 위에 고등어자반 구이는 부엌은 물론 옆집까지 냄새를 피워 함께 못 먹은 게 미안했던 시절, 주방시설이라고는 아궁이와 연탄, 석유곤로가 전부였으며 양념이라야 기본적인 고추장·된장 외에 달리 입맛을 돋굴만한 재료가 없었다.

인공조미료 라고는 미원이 전부였지만 가장 좋은 반찬은 ‘시장기’라던 어머님의 말씀은 세월이 수 십 년 지난 지금까지도 틀리지 않았다.

세월이 10년 쯤 지나 3분 요리라는 게 출시되었고 컵라면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만 해도 나무 불 때는 가정과 좀 살만하면 석유곤로를 피워 밥을 했으며 전기밥솥이 신기했을 시절이었다.

세월이 다시 10년 더 흘러 이제는 1회용 포장 음식이 대세를 이뤘다. 언젠가부터 부뚜막은 사라지고 주방은 부엌이라는 실외공간에서 실내로 진입했다.

추위에 떨며 조리하던 할머님시대에서 같은 거실을 공유하며 남편이 함께 가사를 거드는 신세대로 접어들면서 조리는 요리책자나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따라 해보는 수준으로 변해갔다.

이 때만 해도 이른바 어머님의 손맛은 다음 세대로 전해질 시간적·문화적 여유가 있었고 그럴 수도 있다고 공감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다시 10년 이제는 배달문화가 주를 이뤘다. 밥 대신 전화 한 통이면 치킨, 피자, 족발은 물론 출장뷔페까지 산해진미가 다 배달되는 세상이 도래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어진 건 음식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해냈다. 이때부터 점차 제자리를 잃어가는 집밥의 굳건한 자리는 대형할인매장의 진열장이나 푸드 코너의 화려한 인테리어에 밀리기 시작했다.

갈수록 강해지는 자극, 다양한 양념에 습관이 된 입맛은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고 배고파 죽겠다던 국민들은 배불러 죽겠다며 먹기 위해 벌던 돈을 살 빼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이제는 먹을 게 없어서 못 먹는 것 보다는 먹어도 살 안찌는 음식이 대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집밥이 사라지면서 어머니의 손맛도 점차 사라지며 기성품에 길들여진 주부들의 조리법이 당연한 것이 되었으며 지금같은 글은 아재나 꼰대 그이상의 넋두리에 불과해졌다.

물론 대량 구매로 저가로 식재료를 구매하여 위생적으로 만든 기성품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두부 한 모, 어묵 하나를 썰더라도 칼질에는 정성이 필요하며 불 조절하는 과정에도 맛있게 먹이고 싶은 마음이 기본이 되므로 강조하는 것이지 현재의 발달해 가는 음식문화를 탓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재료를 보면 백열등을 껐다 켰다 하루 두 번씩 달걀을 뽑아대고 항생제를 먹인 사료를 먹여야 잘사는 닭들의 환경은 무늬만 달걀이지 온 동네 돌아다니며 영양분을 섭취한 토종닭의 알과 결코 맛이 같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주성분이나 수입처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대부분 외국산 일색이고 수입과정만 수 개 월이 걸리는 유통기한을 고려하더라도 화려한 포장 대비 믿고 먹을 만한 재료가 얼마나 될까 하는 의구심이다.

사실 음식은 입으로 먹고 내장으로 소화하며 항문으로 내보는 것일진대 실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 보기 좋은 것만 추구하다 보니 눈으로 먹고 소화과정에서는 인공조미료가 온갖 현대병을 일으키며 배설과정에서는 치질 관련 병원의 환자를 늘리고 있다.

근본적으로 아비는 돈을 벌고 어미는 음식을 조리하며 자식은 음식이 아니라 사랑을 먹는 것이 맞는 이치다.

그래서 밥상머리 교육도 필요했던 것이며 어쩌다 자반 한 손만 구워도 재료의 귀함으로 인해 식탁의 가치가 올라간 것이다.

비록 부족하지만 음식재료는 신선했으며 간단했지만 조리는 정성이 더했고 밥상은 숭늉 한 그릇에도 행복이 넘쳤다.

작금의 먹방을 보면 먹음직한 장면에 시청률이야 올라가겠지만 연일 맛집만 찾아다니면 맛의 자극에 한계가 올 땐 어쩔 것인가. 끝없는 맛집은 없다.

인간의 탐욕중 가장 무서운 게 식탐이다. 적절한 절제와 맛에 대해 다음을 기약하며 남겨두는 미덕은 한국인의 입맛에 덕이 있음을 아는 것이며 마치 감나무의 까치밥을 남겨두는 것과도 같은 이치 아닐까.

세상에는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이 있다. 근본적으로 여성은 주방의 주인공이며 조연이 남편일 수는 있지만 돈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이 온다면 존재가치가 유지될까.

과거에 남편이 늙어 마누라 없으면 밥도 못 얻어먹는다는 시대는 지났다. 최근 장바구니 물가가 천정부지로 상승하고 있다.

재료를 구입하는 것 보다 기성품이 쌀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습관되어 잃어버린 조리법은 식자재 가공 공장라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젠 숨바꼭질도 안 하겠지만 하나둘씩 놀던 아이들이 집으로 들어가고 시골집 굴뚝 위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던 시절이 문득 그립다.

김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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