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재의 문학산책]감자꽃을 보면 생각나는 민족 시인... 「감자꽃」 · 「땅감나무」 시인 '권태응'
[박상재의 문학산책]감자꽃을 보면 생각나는 민족 시인... 「감자꽃」 · 「땅감나무」 시인 '권태응'
  • 박상재(한국아동문학인협회 이사장) kmaeil86@naver.com
  • 승인 2023.08.2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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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천(洞泉) 권태응(權泰應)은 1918년 4월 20일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옷갓) 381번지에서 아버지 권중희와 어머니 민병희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8세까지 이 집에서 한학자인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그 후 1925년부터는 칠금동 362번지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집은 남한강과 탄금대가 가까운 칠금동 언덕 위에 있었는데 주변에 감자밭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신립 장군의 원한이 서린 탄금대를 자주 찾았다. 충장공 신립 장군은 권율 장군의 사위로 임진왜란 때 군사 8,000여 명을 거느리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맞아 탄금대에서 격전을 치렀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의 열두대라고 하는 절벽은 신립장군이 열 두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한 곳으로 유명하다.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신립장군은 그만 달천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1927년 충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현재 경기고등학교로 동천은 33회 졸업생인데 최규하 대통령과 동기이다. 그의 아들 권영함은 1947년생으로 경기고 62회 졸업생이다. 고등보통학교 시절, 학업 성적은 전 과목에 걸쳐 우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감수성이 높고 정의감이이 투철했던 그는 문학과 음악 부문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운동에도 소질이 있어 학교 대표 정구팀 주장으로 전국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권태응은 민족정신과 항일 의식이 누구보다 투철한 학생이었다. 항상 우리글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 역사를 배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조선어 시간만 되면 많은 질문으로 교사를 힘들게 하여 곤경에 빠뜨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친일파의 아들인 동기생을 구타한 사건으로 종로 경찰서에 보름동안 구금되기도 했다. 친일파 아들이 졸업앨범 편집위원이었는데, 앨범 속표지에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꽃 문양을 집어넣은 것이다. 이것을 보고 참지 못하여 7명의 학생들이 합세해서 편집위원의 잘못을 추궁하며 구타했다. 그 때문에 구속될 지경에 이르렀으나 담임과 학교 측의 부단한 노력으로 학적부에 ‘요주의 인물’이라고 기록하는 것으로 겨우 사건이 무마되었다.

  1937년 3월, 제일고보를 졸업한 후 4월 일본의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했다. 1938년 3월 재학 시절에 독서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고교 동창인 엄홍섭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식민지가 되어 버린 조국의 참상을 바로 알고 지식인으로서 자신들이 해야 할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논의한 것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강력하게 항의했는데 이것도 체포 구금된 이유가 되었다. 일본 경찰은 권태응에게 ‘치안유지법 위반’과 ‘내란음모 예비죄’를 덮어씌웠다. 1939년 5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토쿄 스가모 형무소에 구금되었다.

  권태응은 열악한 수감생활로 폐결핵에 감염되었다. 1년이 되지 않아 폐결핵 3기가 될 정도로 병세가 급속히 악화,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1940년 6월에 병보석으로 출옥되었다. 하지만 재학 중인 와세다 대학에서도 그를 퇴학시켰다. 병든 몸으로 귀국하여 1941년 인천의 적십자 요양원에 입원했다. 

  그곳에서 간호사 박희진을 만나 극진한 간호를 받고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다. 권태응은 1944년 박희진과 결혼한다. 그리고 고향인 충주로 돌아와서 요양 생활을 계속했다. 1945년 농사를 짓다가 마침내 해방을 맞이했다. 1946년 아픈 몸으로도 야학을 열어 동네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소인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1947년에 육필 동시집 『송아지』, 『하늘과 바다』를 엮었다, 1947년 <소학생> 4월 호에 동요시 「어린 고기들」을 발표하면서 한 호도 거르지 않고 <소학생>에 동요시를 발표했다. 1948년에 육필 동시집 『우리 동무』, 1948년 12월, 마침내 글벗집에서 첫 동요시집 『감자꽃』을 펴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아픈 몸을 이끌고 두 번이나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 전쟁 중이라 결핵약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1951년 3월 28일, 방위군에 지원했던 동생 태윤이 마이신을 구하러 갔다가 약은 못 구하고 귤 몇 개를 구해왔다. 귤을 받아든 권태응은 귤을 쥔 채로 눈을 감았다. “일어나서 많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유언을 남긴 채 33세의 젊은 시인은 숨을 거두었다. 권태응은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광명산(팽고리산) 기슭에 묻혔다. 1968년 5월 5일 윤석중이 이끄는 새싹회와 지역 유지들의 노력으로 감자꽃 노래비가 탄금대에 세워졌다. 

  슬하에 남매를 두었지만, 아들 권영함은 미국으로 이민하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그의 항일 활동이 인정되어 2005년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었다. 충주중원문화재단에서는 동천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18년 권태응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감자꽃」 전문

   초여름이 되면 감자밭의 감자에서는 하얗거나 자주색의 감자꽃이 핀다. 하얀꽃이 핀 감자는 땅 속에 있는 감자알도 하얀 감자가 분명하고 자주색 감자꽃의 뿌리에는 자주색 감자가 달려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이지만 시로 표현한 이는 권태응이 처음이다. 랭보의 말대로 처음 발견하는 자가 곧 시인인 것이다. 권태응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감자꽃」은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創氏改名)에 대한 반항으로 쓴 시이다. "성과 이름을 바꾸더라도 백의민족의 뿌리는 변치 않는다"라는 말을 감자꽃에 비유한 것이다.

키가 너머 놉흐면,/ 까마귀 떼날너와 따먹을가바/ 키즉은 땅감나무 되엿답니다// 
키가 너머 놉흐면,/ 애기들 올너가다 떠러질까바/ 키즉은 땅감나무 되엿답니다
  「땅감나무」전문

   ‘땅감’은 토마토를 일컫는 말이다. 토마토의 모양이 감처럼 생겼는데 땅과 가까운 곳에서 열리므로 그렇게 불리었다. 토마토는 한해살이이므로 나무라고 쓰는 것은 오류이지만 감나무와 대비하기 위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감나무는 키가 너무 높아 까마귀가 떼 지어 날아와 따 먹고 가고, 어린 아이들이 올라가다 떨어지기도 하는 나무이다. 권태응은 이 작품에서 ‘땅감나무’와 ‘감나무’, ‘아기들’과 ‘까마귀 떼’를 대비시켜 의식을 투영하고 있다. ‘감나무’와 ‘까마귀 떼’가 이기적인 어른들의 세계라면, ‘땅감나무’와 ‘아기들’은 평화로운 동심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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