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관동대지진 100주기 조선인 위령제
[덕암칼럼] 관동대지진 100주기 조선인 위령제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3.09.01 08: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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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오늘은 아무 죄 없이 식민지 국가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어설픈 명분하에 소중한 목숨을 잃은 조선인들이 집단 학살당한 날이다.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에 일본 제국 사가미 만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관동 대지진은 사가미 해곡 대지진이다.

7.9의 간토 대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아비규환의 현장 그 자체였다. 이미 1922년에 큰 지진이 있었고 1894년 메이지 도쿄 지진과 1855년 안세이 에도 지진도 있었으며 그 이전에도 간토 남부지방을 진앙으로 하는 지진은 여러 번 있었다.

관동 대지진은 5분 간격으로 세 차례 일어난 해구형 지진으로 첫 번째 여진이 도쿄만에서 12시 1분에 일어났고 2번째 진도 7.3의 여진이 야마나시 현에서 12시 3분에 발생했는데 이 세 지진은 모두 약 5분 이상 계속됐다.

여기서 그친 게 아니라 다음날에도 강력한 여진은 계속됐고 이틀 만에 규모 진도 6 이상의 여진이 간토지방에서만 무려 15번이나 발생, 해당 지역은 지옥 그 자체였다. 지진 사망자의 90%가 화재로 인한 사망이다.

만약 새벽시간대였다면 최대 20만 명은 사망했을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때마침 전날인 8월 31일 일본 큐슈 지방에 태풍이 상륙했고 목재 건물구조에 화재는 순식간에 확산돼 화염 소용돌이까지 발생했다.

10만 명에서 14만 2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7천 명이 실종됐으며 피해액은 지진 발생 전년도 국민 총생산액의 37%를 넘었다. 일본은 이후 1927년 쇼와금융공황과 30년의 쇼와공황, 그리고 불만이 가득 쌓인 군부가 폭주하기 시작해 일본 정부는 군부에 굴복하자 군부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패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일본은 관동지방의 대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했는데 이 틈을 타고 한국인과 사회주의자를 탄압할 기회로 삼았다. 일제는 한국인 폭동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도쿄·가나가와 현·사이타마 현·지바 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과정에서 군대·경찰, 자경단은 약 6,000명 가량의 한국인을 학살했다. 이후 일본정부는 군대·관헌의 학살을 숨기고 자경단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켜 재판에 회부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석방됐다.

6,000명의 대학살, 조선은 신탁통치 이후 식민지 국가로 일본에 속국이 되면서 모든 주권을 상실했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한국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우리는 용서할지언정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이러한 역사는 다시 재조명되어야 한다. 관동 대지진의 피해는 일본 뿐만이 아니었다. 대지진으로부터 1주일 뒤인 9월 8일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미 해군의 클렘슨급 구축함 수 척이 집단 좌초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지진으로 인해 거칠어진 해류와 파도가 원인이라는 추정도 제기된 바 있다.

한국의 유물로는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에 보관중인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지진으로 인해 모두 소실되고 대출본 47권만 살아남아 2006년에 한국에 반환된 바 있다. 현재 관동 대지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처사는 어떠한가, 그리고 한국에서는 어떤 추모행사가 있을까.

매년 9월 1일마다 도쿄도 요코아미쵸 공원에서 추모식을 열고 있으며 1970년대 이후 도쿄도지사들이 조선인 피학살자들에게도 추도문을 보낼 정도다. 하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이 서서히 고령 등으로 사망했고 100년이 지난 우리에게는 까마득한 전설 정도로 남아 있다.

그나마 일본에는 추도비가 주택가 조그만 골목길에 설치되어 일본인들이 관리하고 있다. 관동 대지진 100주기를 맞이하여 우리는 어떻게 추모해야 할까.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우리 선조들의 넋을 기리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고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당시 아무 근거도 없는 소문은 꼬리를 물고 대학살의 명분이 되었으며 일본 언론도 합세 했다고 한다. 날조되고 조작된 소문에 도쿄 시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자경단을 결성해 조선인을 발견하면 죽창이나 쇠갈쿠리(쇠갈퀴) 등으로 무참하게 학살했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자경단만 3,689개에 달했으며 군과 경찰에 의한 조선인 학살도 함께 자행됐다. 또한 별도로 관헌의 재원을 받아 불령단이라는 폭력단체를 조직해 조선인들을 살해하는 데 노골적으로 가담했다.

군과 자경단, 불령단 등에 의해 학살당한 조선인이 적게는 6,661명에서 많게는 2만 3,000명 이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일본 경찰과 군은 조선인을 보호했을 뿐 조선인을 살해한 건 자경단이라고 발뺌하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1923년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는 학살당한 조선인은 2명이며, 이것도 오인으로 인한 희생이었다고 발표하는 등 학살 사실을 숨기거나 부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조선인을 살해한 건 경찰이 아닌 자경단이라고 주장하는 것부터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본 문부과학성 검증 2005년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와 일본사B 교과서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6,000명 이상과 중국인 200명이 자경단과 관헌에 의해 학살됐다고 해놓고 2010년에는 조선인 학살이란 표현 대신 단순히 많은 조선인이 희생됐다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이마저도 2013년에는 조선인이 희생됐다는 표현마저도 삭제해버렸다. 또한 2013년 6월에는 이승만 정권 시절 작성된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피해자 289명의 명단이 발견된 바 있다.

이듬해인 2014년에는 목격자 및 유족들의 조사가 이뤄졌으며, 2015년 1월 18일 1차 검증 결과 명단에 있던 289명 중 18명이 실제로 학살당했으며 명단에 없던 3명이 새롭게 피해자로 확인되기도 했다.

2015년 12월 최종적으로 명단의 289명 중 28명이 실제로 학살 당한 것이 맞다는 검증 결과를 내놓았다. 이렇게 명백한 증거 앞에서 100년이 지나도 일본 정부는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 또한 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어쩌면 위안부 동원과 일제 강제 징용보다 더 참혹한 역사였음에도 여전히 뒷짐만 지고 있다. 선조들이 공포 속에서 잔인하게 학살을 당했는데도 아직 정확한 사망자 수도 모르고 있다.

정부가 이들의 억울한 넋을 풀어주지 못한다면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외교적으로 풀어보거나 역사 재조명으로 양국관계를 이웃나라로 만들려면 이러한 문제점부터 재정비 해야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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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 2023-09-05 13:51:53
윤미향의 ‘간토대학살’ 추모식 참석을 보며
정부·여당은 이번 추모식을 총련이 주최했다는 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여러 일본 시민단체와의 공동주최다.
총련이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로 확정판결을 받긴 했다. 하지만 재일 조선인 희생자 문제의 진상 규명에 오랜 기간 앞장선 사실까지 깎아내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번 추모식은 좌우 이념을 넘어 재일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는 순수한 한·일 공동의 행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간토대학살 100주년에 정부는 한마디 언급조차 없이 모른 체 하더니, 인제 와서 대통령까지 나서 색깔 몰이를 펼친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오염수 방류 및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으로 여론이 싸늘해지자, 이 건으로 돌파구를 삼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국민들이 언제까지 ‘철 지난 색깔론’을 계속 봐야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