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재의 문학산책] 거룩한 분노, 수주(樹州)에 잠들다
[박상재의 문학산책] 거룩한 분노, 수주(樹州)에 잠들다
  • 박상재(한국아동문학인협회 이사장) kmaeil86@naver.com
  • 승인 2023.10.18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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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은/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논개」 마지막 연

   애국 열사 주논개(朱論介)를 예찬한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는 1898년 6월 한성부 맹현(孟峴, 지금의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나 1961년 3월 14일 예순셋을 일기로 종로구 신교동(자하문로23길 3)에서 삶을 마쳤다. 그가 살던 집터에는 3층 빌라 건물이 들어섰고, 아래층 담배가게 간판 위에 붙여놓은 작은 표지판만이 흔적으로 남아있다. 시인의 모교인 재동초교 교문 옆에도 어린이 변영로를 소환하는 작은 표지석이 있다. 그의 아명은 변영복(卞榮福)이었으나, 성인이 되면서 영로(榮魯)라는 이름을 주로 썼고, 1958년에 변영로로 정식 개명하였다.

  변영로의 호 ‘수주’는 고려 때 부천(富川) 을 부르던 지명이다. 수주는 조상대대로 살아온 부천의 ‘고리울 강상골’을 고향 마을로 삼았다. 그의 원적지는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313번지이다. 수주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신혼살림을 차리고, 맏이를 얻은 곳도 이곳 부천이다. 서울에서도 여러 차례 거주지를 옮겼지만, 그의 주소는 언제나 강상골이었다. 일제 말기에 붓을 꺾고 귀향했다가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들은 곳도 이 곳 수주이다. 변영로는 ​1961년 3월 14일 과음이 원인이 된 인후암으로 타계하여 원적지 고향 선산에서 영면하고 있다. 집안 선산에는 한국의 삼소(三蘇), 삼변(三卞)으로 불리는 삼형제가 나란히 묻혀있다. 대법관을 역임한 변영만, 국무총리를 지낸 변영태, 민족 시인인 수주 변영로가 그 주인공이다.

  수주는 1910년 사립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1912년 자퇴하고, 1915년 경성YMCA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1918년 6월 <청춘>에 영시(英詩) 「코스모스」를 발표할 정도로 영어에 능통하고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1919년 3·1운동 때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YMCA의 구석진 방에서 밤을 새워 가며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우리 겨레의 울분을 세계에 알렸다. 1920년 <폐허(廢墟)>, 1921년 <장미촌(薔薇村)>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신민공론(新民公論)> 주필을 지냈다. 

  수주는 1923년부터 이화여전 강사로 근무하다,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주립대 영문학과를 중퇴하였다. 1933년부터 동아일보 기자로 있던 중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강제 폐간당했다. 자매지인 월간 <신가정> 주간이던 변영로는 손기정의 사진 속 일장기를 지우는 대신 두 다리만을 확대해 ‘세계를 제압한 두 다리’란 제목을 붙여 표지로 삼았다.

 이 사건이 문제가 되어 사표를 내야 했고, 이듬해 터진 ‘흥업구락부’ 사건과 연루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온갖 고문을 겪다가 107일 만에 풀려났다. 광복이 되자 1946년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1950년에 해군사관학교 영어교관을 역임하였다. 1953년에 <대한공론사> 이사장에 취임하여 영자 일간지를 발간하였다. 1955년 초대 한국 펜클럽(국제펜 한국본부) 회장에 선출되어 제27차 비엔나국제펜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변영로는 동창이자 절친인 윤치영과 함께 중학교 수업이나 YMCA 학당 강의를 빼먹는 일이 자주 있었다. 어느날 길거리에서 중앙중학교 교사이자 YMCA 학당 강사인 월남 이상재가 변영로 일행을 보고 그를 불렀다. “변정상씨, 변정상씨!” 계속 부르자 못들은 척하던 변영로가 이상재에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선생님 치매걸리셨습니까? 왜 남의 아버지 이름을 자꾸 부르십니까?” “변정상은 내 친구가 맞지. 그런데 네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씨란 말이냐?” 수주는 월남의 위트에 탄복하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는 한 살 많은 횡보 염상섭, 네 살 많은 공초 오상순과 평생 술친구로 지냈다. 1950년대 한국 문단에서는 "술이라면 수주(변영로)를 뛰어넘을 자가 없고, 담배라면 공초(오상순)를 뛰어넘을 자가 없다."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이들의 기행은 『명정40년』에 나오는 수주의 수필에도 기록되어 있다. 

  변영로가 살던 시절의 소주는 40도가 넘는 독주가 대부분이었다. 1920년대 여름 어느 날, 수주는 절친한 시인 오상순, 소설가 염상섭, 기자 이관구와 함께 성북동 골짜기(지금의 성균관대 계곡)에서 미리 가불받은 원고료로 마련한 고기와 술을 실컷 먹고 마셨다. 취기가 오르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자, 오상순부터 젖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의기가 통한 네 사람은 옷을 다벗고 근처에 매어놓은 소 한마리씩을 타고 혜화동 로타리까지 내려왔다. 구경꾼과 경찰들이 몰려오고 가족들까지 달려오자 나체 쇼를 멈추고 인사불성으로 집에 실려 갔다.

  수주는 1921년 〈신천지〉에 「소곡 5수」를 발표하고 〈신생활〉·〈동명〉 등에 여러 작품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에 펴낸 시집 『조선의 마음』(평문관)이 출간되자 문단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시집에는 그의 대표작인 「논개」, 「봄비」, 「조선의 마음」 등이 실려있다. 이 책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일제로부터 판매금지 및 압수 처분을 받고 말았다. 〈페허〉의 동인이면서도 낭만성이 짙은 시를 발표했는데, 비교적 건강한 서정성과 민족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저서로 『명정40년』(1953), 『수주시문선』(1959), 『수주수상록』(유고집, 1969) 등이 있다. 1948년 제1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수주가 사랑한 고향 부천 고강동에는 그의 호를 기리는 수주초중고등학교, 수주도서관, 수주문학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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