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월동 준비 김장하는 날
[덕암칼럼] 월동 준비 김장하는 날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3.11.2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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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약 30년 전 요즘처럼 겨울 추위가 시작되면 집마다 연탄들이기와 김장 김치 담그는 풍경이 연례행사로 치러졌다. 지금이야 에너지 산업이 발달해 도시가스로 요리, 난방 등 모든 것을 해결하지만 산에 나무를 벌목해 군불을 때던 시절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날들이었다.

한겨울 김장은 주부들 입장에서는 대단한 집안일 중 하나였다. 배추 100포기를 한 접이라 하는데 보통 2접도 거뜬히 담가 내는 능력을 갖춘 주부들의 경험담은 요즘처럼 유튜브에 레시피를 배우지 않아도 충분히 해내고야 마는 의지의 한국인들이었다.

언제부턴가 거추장스럽고 힘만 드는 김장 대신 포기김치부터 갓김치, 총각김치, 겉절이는 물론 백김치, 고들빼기, 깍두기가 포함된 무도 단골 메뉴가 되었다. 제아무리 살아서 다시 밭으로 가려던 배추들도 소금물에 한나절 절이고 나면 푹 쳐진다.

다시 물로 씻고 헹구고 밤새 대기하던 배추들은 다음날 온갖 양념에 버무려져 한 포기 김장 김치로 거듭났다. 우리 민족의 음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김치, 된장 외에 청국장, 삭힌 홍어 등 발효식품들도 있지만 단연 김치가 대한민국의 상징적 음식이다.

양념에는 젓갈과 생강, 마늘, 고추장, 간장, 미원은 물론 지방에 따라 육회나 굴, 멸치 등 다양한 육가공 식품도 첨가해 맛을 돋운다. 시뻘겋게 버무려진 양념을 배춧속에 적절히 섞어 넣어 만든 김치를 마당 한쪽에 묻어놓은 장독대에 차곡차곡 재어 넣으면 눈 내리는 겨울에 장독 뚜껑을 열고 한 포기 통째로 올려 밥상의 주인공이 됐다.

포기째 막 썰어 밥상 위에 올리면 그 도도함과 권위는 감히 그 어떤 반찬도 꼬리를 내린다. 국을 만들면 김칫국, 찌개에 넣으면 김치찌개, 부침가루로 전을 부치면 김치전, 밥을 볶으면 김치볶음밥, 대체 안 가는 데도 없고 안 어울리는 음식도 없으니 만능 탤런트가 아닐까.

겨우내 지지고 볶고 하다가도 남으면 묵은지로 돌변해 끝까지 음식폐기물로 버려지는 동료들을 외면한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김치를 빼놓으면 며칠이나 버틸까. 물론 개인의 식성에 따라 일 년 내내 안 먹고도 살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김치와의 인연을 잘 유지하고 있다.

숙성 과정에서 발견된 과학적 근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근사근한 맛의 향연을 가전제품 회사가 놓칠 리 없다. 잽싸게 멀쩡한 냉장고를 두고도 김치냉장고를 별도로 구매하게 만드는 마케팅 전략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무슨 발효식품이 툭툭 터지는 소리를 낸다며 식욕을 자극하면 TV 광고 연출만으로도 충분히 구매 욕구를 자극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김치냉장고는 안방이나 베란다를 차지하면서 이제 모든 국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김치냉장고 없으면 안 될 만큼 자리를 잡았다.

11월 22일은 ‘김치의 날'이다. 정부는 지난 2020년 김치산업의 진흥과 김치 문화의 계승·발전 등을 위해 매년 11월 22일을 법정기념일인 ‘김치의 날'로 정했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아르헨티나도 대한민국이 김치 종주국임을 명시한 김치의 날을 공식 기념일로 제정한 첫 번째 국가가 됐다.

미국에서는 2021년 8월 캘리포니아를 필두로 워싱턴DC 등 여러 주 의회에서 김치의 날로 지정했으며 김치의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기무치라 하여 김치의 권위를 흉내 냈고 중국에서는 아예 자국의 음식이라며 우기고 있다.

부러우면 지는 것인데, 어쨌거나 김치의 날이 절기상으로 김장 담그기에 가장 적절한 날씨라는 점에서 12월 중순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김장 나눔·김장 축제가 펼쳐질 예정이다. 이제는 김장이 소외계층이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대표적인 소재가 됐다.

과거에는 동네 주부들이 집마다 김장 담그는 집을 돌아가며 품앗이로 정했으며 모여 일하는 중에 동네 정보가 공개적으로 입소문을 타고 우물방송국이 운영됐다. 잘 버무린 김칫소로 삶은 돼지고기를 돌돌 말아 한 입에 어구적 거리며 물고 씹노라면 아주 가득 담긴 김치로 혀조차 둘 데 없는 우물거림에 힘들지만 어찌하든 다 넘어간다.

사실 김장이라는 명분으로 남정네들은 얼씬도 못 하는 금남구역을 정해 마음껏 수다도 떨고 속내도 털어놓으며 입담을 즐기기에 더 없는 연례 행사장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민 반찬 1번지 김치는 색다른 맛과 면역증강 등 건강에 도움을 주는 22가지 이상의 효능을 발휘한다.

얼마나 좋은 지는 독자들이 인터넷 검색을 해보는 수고를 당부하며 올해 김장은 작심해서 수작업에 들어갈 계획이다. 두 달 전 심은 배추 약 100포기가 엊그제 동파로 살짝 얼기는 했지만, 포기마다 끈으로 묶은 덕에 별 차질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리적으로 섬마을이니 주변이 온통 바닷물이라 소금값 들어갈 일 없고 동네 사람들이 직접 추수한 고추는 생산가로 구입할 수 있다. 배추는 하늘과 비와 땅이 공짜로 만들어준 것이니 직접 담그기만 한다면 인건비조차 들어가지 않으니 먼저 달라하시는 독자 몇 분께는 택배로 보내드릴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다.

모든 재료가 자연산이고 판매 목적이 아니니 양념인들 또 얼마나 다부지게 섞어 넣을 것인가. 얼마 전 세계생활체육연맹 정회원 승인을 받으려 독일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아마도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워낙 많은 시대라 공감하겠지만 고추장, 김치, 소주는 포장 용기도 간단해 인기 준비물이다.

몇 날을 빵으로 때우다 얼큰한 김치찌개를 먹는 기쁨이란 시차 적응보다 먹는 적응이 더 큰 스트레스였다. 김치의 면면을 보면 단순한 반찬을 넘어 조상의 슬기, 지혜, 함께 나누는 이웃 간의 정이 포함되어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많은 단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김장 김치로 정을 나눈다. 언젠가는 이런 풍습마저 촌스럽다며 사라지겠지만 적어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