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남의 불행 나의 행복
[덕암칼럼] 남의 불행 나의 행복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3.11.30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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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배고픈 건 참아도 배아픈 건 못 참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중국에서 시작된 말인데, 우리나라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이 있다.

또 유사한 말이 남의 불행, 나의 행복이다. 남이 잘되면 박수를 치고 축하를 해주는 것이 옳지만 마음속으로는 성공한 자를 자신과 비교해 생기는 상대적 박탈감이 질투의 발단이 된다.

약 30년 전만 하더라도 학교에서 서로 감정이 맞지 않으면 일명 ‘맞짱’을 뜨고 누가 이겼든 학교 수돗가에서 서로 코피를 닦아주며 화해하는 장면이 흔했다. 싸우면서 정든다는 말이 있을만큼 정직하고 당당했다.

같은 반 급우가 가난해서 도시락을 못 싸오면 대충 모여서 수저만 들어도 배를 채울 수 있었던 정서였다. 체육복과 교련복이 없으면 비슷한 체구의 친구가 빌려주고 대충 넘어가던 날들이 하나 둘 모이면 정이 들었고어느새 세월이 흘러 졸업식 때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각박해진 인심이 넓은 마당 대신 아파트라는 주거 문화로 변했고 핵가족화로 달라진 가족 구성원들의 자기중심적 사고가 발달했다. 학교 다녀와서 방 문만 닫으면 같은 집이라도 전혀 대화가 없는 공간으로 변해가는 것이 시대적 변화일까.

우리 민족의 약점이기도 한 흉내내기가 언제부턴가 망국의 전주곡으로 분위기를 휩싸고 돌았다. 일본에서 건너 온 이른바 ‘이지메’라는 한국판 ‘왕따’는 단체에서 특정인을 표적으로 하여 집단으로 괴롭힘을 가하는 것이다.

소위 일진이라는 가해자와 가해자에게 잘 보여야 덜 맞고 괴롭힘의 표적에서 제외될 수 있기에 동조하거나 묵인하는 주변인들 둘 다 공범이다. 여기서 당하는 입장은 아침에 눈을 뜨기 싫고 학교 가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을 수밖에 없다.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분노와 무기력함, 한창 예민할 사춘기시절 정서적으로 피폐해지는 자기 모습에 스스로 괴롭거나 자칫 커다란 불상사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정이 마르고 이기적 사고와 황금만능주의에 달라도 너무나 달라진 대한민국의 정서는 아프리카 사하라처럼 사막화되어 가며 현재에 이르렀다.

불과 3~40년만이다. 세월이 흘러 학창시절에 있었던 학원폭력이 사회진출 후에도 도덕적 문제가 되어 비난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그러한 분위기가 군대나 직장을 비롯해 성인이 되어서도 같은 괴롭힘에 치를 떠는 피해자들이 현대사회 어두운 사각지대에서 신음하고 있다면 독자들은 믿을까.

최근 언론에 보도된 통계 중 직장내 괴롭힘 경험자 10명 중 1명이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고 있다는 내용에 대해 문제 제기만 하고 왜 대안 제시를 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으로 필자의 생각을 공유해 본다.

여기서 괴롭힘이란 학창시절처럼 직접적인 폭행으로 상해를 입히는 게 아니라 소위 티 나지 않는 정신적 따돌림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월적 위치에서 언어 성추행을 하거나 업무적 편의를 빙자해 사적인 업무를 전가하는 등 외부에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불합리한 정신적 괴롭힘을 의미한다.

물론 육체적 노동이나 기타 업무와 무관한 일을 전가해 인격을 무시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반항했다가는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더 강한 괴롭힘을 당할 것이며, 쥐 죽은 듯 적응하는 것이 그동안 기존 사람들의 룰이라면 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세상 어디든 그들만의 세상은 있는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지 참고 참다가 절에 불을 지른다면 이는 자신과 이웃, 반사회적 행동에 대해 응분의 대가만 따를 뿐이다. 이 세상은 원하는 일만 하고 가고 싶은 곳만 갈 수 없는 복잡한 인간사다.

올챙이는 우물을 벗어나 바다로 가면 죽을 것 같지만 그 나름대로 살아가게 된다. 최근 모 설문조사에서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괴롭힘을 당했던 인원 중 10.9%가 극단적 선택을 고민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사업주가 괴롭힘의 가해자인 경우는 19.2%였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직장내 괴롭힘 실태조사 보고서에 괴롭힘을 경험한 적이 없는 경우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는 비율이 7.7%, 괴롭힘을 경험한 사람은 3배에 가까운 20.6%에 달했다는 것이다.

괴롭힘 행위의 지속성과 반복성을 개념 정의 규정에 추가해야 한다는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주장은 사실상 죽기 직전까지 참으라는 지침과 다름없다는 관련 분야의 목소리다. 괴롭힘의 주체는 가해자고, 부주체는 피해자다.

어린이집에 사탕을 10개씩 똑같이 분배해도 반나절만 지나면 한 아이에게는 6개가 있고 또 다른 아이에게는 4개가 있는 게 사람 사는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왕따’와 갑질은 근절될 수 없는 것이다.

해결책은 당사자에게 있다. 혹자는 알지도 못하면서 말한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 비춰볼 때 을의 입장에서 마냥 참을 게 아니라 들이받을 때는 상황을 가리지 말고 상대를 가리지 말고 혼자만의 상상을 초월해야 한다.

갑이 하늘같지만, 막상 들이대고 보면 연약한 한낱 사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을의 입장에 길들여진 가스라이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춘기 시절 4년 동안 1,000번도 넘는 왕따를 겪어보았고, 이후 4년 동안 받은 경험의 절반은 갚아준 경험이 있다.

죽을 것만 같아도 막상 갚고 나면 소심한 자화상을 발견하게 된다. 기자의 길을 걷고 나서도 10년동안 ‘왕따’의 시련은 더 없는 훈련이 되었고 집요하게 괴롭히던 동종업계의 기자들을 돌이켜보면 훌륭한 조교였던 셈이다.

직장내 괴롭힘으로 힘들었던 사람이라면 혼자만의 고민과 분노로 견딜 게 아니라 길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믿고 소통의 채널을 과감하게 두드려 봐야한다. 예상 밖으로 을이 생각하는 갑은 허술하고 빈약하다.

서로 경계하는 시점부터 생기는 게 벽이다. 을은 을이라 생각할 때 을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