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빼앗긴 서울의 봄
[덕암칼럼] 빼앗긴 서울의 봄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3.12.12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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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최근 극장가에 흥행가도를 달리는 서울의 봄.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인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에서 발생한 군사반란 사건이 재조명되자 온 국민들의 관심이 모아졌다. 새삼스레 각광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44년 동안 조용했던 긴긴 세월, 한때 군사정권의 군홧발에 짓밟혔던 피해자들은 입이 없어서 말을 못했을까. 어쨌거나 그 날 그 사건으로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먼 길로 돌아서게 됐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서울의 봄은 군 조직인 하나회가 단초가 되어 역사의 수레바퀴가 가던 길을 멈춘 사건을 다루고 있다.

보안사령관 전두광이 반란을 일으켰고 군대 내 사조직을 총동원하여 최전선의 전방부대까지 서울로 불러들인다는 내용은 누가 봐도 전두광이 전두환 前 대통령이었다는 것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점철됐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모두 가명이었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유명인사들과 권력가들 중 건재한 사람들도 많으니 이번 영화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지난 9일 누적 관객도 7백만 명을 돌파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총 9시간동안 벌어진 12·12사태는 아무리 권력을 가졌어도 혁명이 아닌 반란으로 치부되고 있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역이라는 공식이 무색해지는 사건이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돈으로 녹봉을 받고 세금으로 구입한 총으로 국민위에 군림하는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그 후 1980년 제11대 대통령선거에서 100% 찬성으로 당선, 1981년 제12대 대통령선거에서도 90.3%의 찬성을 얻어 당선됐다.

한번 거머쥔 권력은 6·29선언이라는 민주드라마로 포장돼 1987년 제13대 노태우 대통령이라는 동색의 군사정권이 배턴을 이어받았다. 이미 36.6%라는 찬성이 군사정권의 저물어가는 국민지지를 보이면서 민주화의 본격적인 국민적 공감대가 봇물처럼 도심으로 쏟아져 나왔다.

1992년까지 이어진 군정시대는 12년간 서울 남산과 서빙고 분실의 서슬퍼런 공안의 칼바람이 불었고 많은 민주투사들이 고문과 옥고에 시달리는 암흑시대를 보내야 했다. 그동안 故 박정희 前 대통령의 시해사건인 10·26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재조명은 많았다.

삼청교육대로 인한 국민적 분노와 역사적 사건에 대한 드라마도 있었다. 하지만 12·12사태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 영화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극장가의 흥행이 기대됐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의 흐름을 알고 극장가를 찾았던 국민들은 마치 반란상황에 대한 모든 장면을 타임머신을 타고 본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됐다. 권력에 눈이 멀어 정치인의 자리를 탐낸 군인들의 야욕이 리얼하게 펼쳐지면서 거꾸로 돌아가는 민주화의 시계바늘은 그렇게 멈추지 않았다.

당시 반란군에 대치하며 나름 군인의 길을 걸었던 주역들은 충분한 대가를 치르면서 역사속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겨우 목숨만 연명한 채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다행히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정치로 잔뼈가 굵은 김영삼 前 대통령이 민주화를 선포하면서 과거청산 작업에 들어갔다.

교도소에서 다시 백담사로 옭겨가며 사죄의 길로 들어섰지만 이 또한 시간이 약이 되질 못했다. 김영삼 정권은 군부독재 청산의 상징적 조치로 목에 깁스를 했던 하나회를 사정없이 숙청했다.

이미 성장해버린 거물들을 청소한다는 것은 김영삼 정권이 목숨 걸고 하지 않으면 절대로 처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화가 개봉되자 이를 소재로 한 언론보도와 치열한 아군들의 총격전에 참여했던 주역들의 목소리까지 생생하게 공개되는 등 영화는 영화로 그치지 않았다.

나라를 지키는 국방의 무기들이 아군들끼리 총질하는 사태로 이어졌고, 졸지에 목숨을 잃은 군인들은 그 죽음조차 숭고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도심에서 굉음을 내며 달렸던 탱크, 나름 막아보겠다며 버티던 군대 내부의 갈등, 일부 군인은 업무 중 사망한 순직으로 처리됐다가 긴 세월이 지난 2022년에서야 교전 중 사망한 전사로 인정됐다.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그마저도 인정받지 못하는 죽음들이 아직도 불명예를 안고 있는 경우는 또 무엇일까. 김오랑 중령은 반란군에 맞서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도 없고 국방부 헌병대 소속 정선엽 병장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소속 박윤관 일병의 경우가 그러하다.

12·12 이후 14년이 지난 1993년 7월, 장 前 사령관은 동료 장성들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 반란을 주도한 34명을 검찰에 고소했다. 하지만 당시 검찰은 1년 뒤 죄가 인정됐지만 처벌하지 않는다는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1994년 10월 29일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후세에 맡기고 사법적 판단은 이번 검찰의 결정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으로 종결됐다. 일사부재리의 면죄부를 준 것이나 진배없는 결과에 대해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겠느냐는 것이 고소인들의 입장이다.

서울의 봄 끝자락에 펼쳐진 노태우 前 대통령의 정치자금은 허덕이던 국민 분노의 도화선이 됐다. 결국 특별법을 만들었고 재수사에 들어간 검찰은 이듬해 이들 중 16명만 재판에 넘겼다.

1심 재판부는 전두환 사형, 노태우 22년 6개월을 선고했고, 전두환 비서실장이던 허화평 등 징역 10년이 4명, 징역 8년 4명, 징역 7년 3명, 징역 4년은 2명이었다. 항소심에서는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 등 전원 형량이 줄었지만 8개월이 지난 1997년 12월 20일 정부는 관련자 전원을 사면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수감된 지 2년 만에 풀려났다. 또, 12월 12일 당일 연희동 비밀요정으로 군 수뇌부를 유인했던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은 2018년 86세로 숨질 때까지 캐나다에서 숨어 살며 매달 2백만 원에 달하는 군인연금을 꼬박꼬박 지급받았다.

그렇다고 반역의 죄가 사라질까. 죽어서도 사죄의 길을 택하지 않은 고인의 처사가 소신이고 권력의 뒤안길로 사라진 유종의 미 였을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21년 11월 23일 향년 90세로 운명을 달리한 故 전두환 前 대통령은 장지 예정지였던 경기도 파주시 주민들의 반대로 안장이 무산됐다.

2023년 지금의 서울에 넘치는 자유 이면에는 그렇게 암울한 역사가 분명 있었고 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임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