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어찌 이리도 어리석을까
[덕암칼럼] 어찌 이리도 어리석을까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3.12.26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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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백년지대계가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자고로 교육정책이란 한 나라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중·장기적 안목과 전문가들의 첨예한 검증은 물론 정부부처와 학부모들까지 신중히 검토하여야 함에도 시류에 따라 방향조차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교권과 학생인권이 시소 놀이를 하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어느 한쪽이 기울어지면 무슨 난리가 난 것처럼 언론보도가 극성을 떨고 관련 법안을 만드는 입법 구성원들이 개정 법안을 마련하면 교육부에서 이를 토대로 방향을 설정한다.

학생인권조례의 탄생 배경부터 알아보자. 약 50년 전 대한민국 교육계의 위상은 군사부일체였다.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같은 몸이라는 논리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격언과 함께 수요 대비 공급이 절대 부족한 당시의 교권은 하늘이었다.

골목마다 아이들 노는 소리에 조용할 날이 없었고 운동회라도 하려면 전날 폭죽까지 밤하늘을 수놓을 만큼 대단한 축제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태권도와 곤봉 돌리기는 물론 걸핏하면 세숫대야까지 동원해 작업시간에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 또한 기본이었다.

선생님의 숙제 검사나 위생 검사, 심지어 집안의 가재도구까지 적어내야 했으며, 간혹 부모님 모시고 오라거나 가정방문 날에는 원님 행차 못지않게 중요한 날이었다. 담임교사의 표정에 따라 학생들은 가슴 졸이며 화풀이 대상이 되었고 자칫 말대꾸라도 했다가는 온 몸을 부위 상관없이 마구 때려도 되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이미 학급 대비 수가 넘쳐나는 학생들로 인해 고등학교 진학부터 학력고사라는 시험공부의 필요성이 생겼으며 좋은 대학은 모든 학생들의 꿈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남학생들이 까까머리에 여학생들도 검은색 교복을 입고 교사들의 지시에 순응하며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해야 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는 그래도 됐었다. 5남매·7남매 키우던 시절이 지나고 가정마다 귀한 자녀들 매 한 대 안 때리고 키우다 보니 감히 내 자식을 누가 건드렸냐며 스승이 선생이 되고 교사가 되고 나서야 점차 극성스러운 학부모들이 교권을 추락시키기 시작했다.

그림자도 안 밟던 스승의 위상은 하나둘씩 학생인권의 필요성을 부각시켰고 결국 2009년 12월 17일 학생들이 인권 주체로 학교에서 존중받도록 하기 위해 총 5장 48조와 관련 부칙으로 구성되어 차별받지 않을 권리, 폭력 및 위험으로부터의 자유, 교육을 받을 권리가 보장 받게 됐다.

이 밖에 사생활 비밀과 자유 및 정보의 권리, 내심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 자치 및 참여의 권리, 복지에 대한 권리, 징계 절차에서의 권리 등 9개 분야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인권교육 및 실천 계획, 상담 및 구제 장치도 마련됐다.

그 당시 학교 분위기로는 당연한 법안 마련이었고 이미 많은 학생이 구태의연한 교육계의 폐단에 희생된 바 있다. 필자 또한 학교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교직원들과 학생의 미래를 위해 졸업은 시켜야 한다는 양단간에 갈림길에서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마친 바 있다.

그만큼 살벌했던 고교 시절을 보냈고 당시의 학창시절은 영화 ‘친구’를 연상하게 할만큼 열악한 환경이었다. 1989년 전교조가 설립될 당시만 해도 교육계에 청신호가 들어오는 줄 알았다. 폭력과 억압의 시대가 종식되고 학생들의 인권이 존중받는 세상이 되는 줄 알았다.

어쨌거나 그렇게 마련된 학생들의 인권은 점차 세월이 흘러 교권을 앞섰고 언제부턴가 인터넷의 발달로 학생들 간의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면서 스승은 교사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점차 달라지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선생이라는 직분으로 학생들을 체벌하거나 폭력으로 다스리는 것은 점차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

이제 갑과 을이 바뀌었다. 교사들의 지시사항이나 과제물은 학생들의 스트레스가 되었으며 교내에서 사용하는 단어조차 언어폭력으로 치부되어 해당 교사가 행정처분을 감수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교실 내에서 야단이라도 치면 스마트폰을 든 손에서 언제 영상을 찍어 민원을 올릴지 모르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한번 뒤바뀐 입장은 정보에 민감한 학생들간에 교사 위에 군림하는 현상들이 버젓이 행해졌다.

이미 달라진 시대적 변화에 학생들은 점차 감소하고 교사만 유지되는 산술적 계산을 보면 머지않아 학생들 모시기에 정성을 다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교육계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한 해 100조원이 넘는 예산을 어떻게 다 쓸 것인가. 무슨 명분으로 학생들을 다스리며 대한민국 백 년의 앞날을 기약할 수 있을까. 과거의 학생이 아니다. 지금 와서 교권회복하겠다고 다시 학생인권조례를 변경 또는 폐기한다면 과연 오래 전 학생들 위해 군림할 수 있었던 시절처럼 학생들이 가만히 인권을 포기하고 따를까.

필자의 우려에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전국적으로 학생인권조례가 폐지 절차를 밟고 있다. 전국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있는 곳은 서울·경기·인천·충남·전북·제주·광주 등 7곳이다.

충남도의회는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이 상임위원회를 통과해 본회의에 회부됐고 서울시의회도 교육위원회를 열어 해당 안건을 심의키로 했다.

경기도의회도 학생인권 조례 폐지 조례안을 입법예고했고 반대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와 한국청소년정책연대 등 260여 개 단체가 참여한 서울학생인권조례 지키기 공동대책위원회는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인권 퇴행이라며 폐지안 수리·발의에 대한 집행정지를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몇 명의 학생들이 교권에 대항한다고 다시 인권을 폐지한다면 몇 명의 폭력교사로 인해 제정되었던 학생들의 인권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법이 바뀌어도 이제 학생들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비현실적인 법안과 학생들이 충돌한다면 그때는 어쩔 것인가. 교육계도 학부모도 학생들도 모두 따라 주어야 할 법이 각자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갈등을 유발한다면 그때도 교권 회복만 거듭 강조하며 밀어붙일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백년지대계를 이리도 성급하고 소홀히 번복하려 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