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의 양심은 靑廉性
공직자의 양심은 靑廉性
  • 원춘식 편집국장 kmaeil86@naver.com
  • 승인 2010.10.1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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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일부 국무총리 후보자 및 장관후보자들이 재산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자진 사퇴한 이충호 여성부장관 후보자의 재산 목록엔 아파트, 사무실 오피스텔, 점포, 임야, 논 도로 같은 온갖 종류의 부동산이 망라됐다.

공직자는 국민의 공복이다. 도덕성이 결례돼서는 안된다. 우리 나라 최고 청백리(靑白吏)는 신라의 화랑검군(花郞劍君)이다. 극심한 흉년을 당해 동료들이 국고의 곡식을 훔쳐 나눠가진 뒤 그에게도 한몫 주었다. 검군은 화랑으로서 의(義)가 아니면 비록 천금(千金)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물리쳤다. 그를 죽이려 해 피신할 것을 권하자 검군은 그들이 잘못하고 내가 정직한데 왜 내가 도망가느냐 며 거절했다. 그는 피살됐고 죽음으로 지킨 그의 청백 정신은 후대에 귀감이 됐으며 삼국통일의 원동력으로 발전했다. 청백정신이 공직자 윤리로 확립된 것은 관료체계가 정착된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서다. 청백리는 지행일치(知行一致)를 근본이념으로 삼고 기개 지고 금욕으로 정직하게 생활하며 국가기강을 확립하고 나라의 동량이 된 지식인(知識人)이다.

세종(世宗)때 청백리가 많아 현군(賢君)아래 명신(名臣)난다고 세종때 유난히 청백리가 많았다. 90평생 청빈(淸貧)으로 일관한 황희(黃喜)는 육조판서를 모두 거치고 영의정(領議政)만 18년을 역임한 관직생활 60년의 청백리로 조선리도(朝鮮吏道)의 귀감이 됐다. 그로인해 세종 같은 임금님에 황희같은 정승이면 살맛난다는 유행어까지 생겨났다. 우리 역사상 세종시대가 가장 진취적, 창조적, 도덕정 사회정의가 구현된 시대라고 한다. 그렇게 된데는 황희, 맹사성, 류관, 박팽년, 성삼문 등 명성 높은 청백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맹사성(孟思誠), 유관(柳寬) 모두 집이 워낙 비좁아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 빗줄기가 방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유관은 우산으로 가리며 부인에게 우산없는 집은 이 비를 어떻게 견딜고 하고 걱정했다. 현직 병조판서로 별세한 이이(李理)의 집에 장례 치를 양식이 없었고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끈 명상(名相) 유성용(柳宬龍)이 낙향해보니 끼니를 이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두분 모두 관직에 있을 때 서울에 집한칸 없어 셋집에 살았다.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임란(壬亂)등을 극복하며 500여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청렴성을 최고가치로 간직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한 현종 이후 철종, 고종, 순종대엔 단 한명의 청백리도 없었다. 오늘의 공직자들은 이처럼 출중한 청백리와 비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공직사회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서는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공직사회가 썩으면 동시에 국기(國基)가 흔들렸던 것은 역사적 경험으로 알 수 있다. 공직자 재산공개 파문, 땅투기, 미성년자녀에 대한 편법재산증여, 공직이용 재산증식 등 예상했던대로 비리가 속출했다. 진실성의 결여가 문제다. 어쨌던 재산공개로 공직사회가 심각하게 부패해있음을 확인했다. 공직자 자체정화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펼쳐져야 한다. 공직자 윤리법도 개정하고 윗물 아랫물 맑게 하기도 계속 추진해야 한다. 공직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며 정부는 수락기관이고 공직자는 수락자다. 그런데 이들이 권력과 부(富)를 한꺼번에 거머쥔 거대한 불가사리로 변신, 백성들을 짓밟고 수탈했다. 참다운 공직자는 국민의 공복(公僕)으로서 나름대로 봉사 할 줄 아는 인격을 갖춰야 한다.

인격의 핵(核)은 자존심에 있다. 자존심을 잃으면 치욕을 모른다. 자존심의 핵은 양심에 있다. 양심을 잃으면 허위와 죄악에 빠진다. 공직자의 양심은 다름아닌 청렴성(靑廉性)이다. 청렴성을 상실한 공직자는 사이비 인격자다. 새시대 새 공직자상이 필요하다.

편집국장 원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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