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실록 '박정희 이력서' 작가 이대희
[인터뷰] 실록 '박정희 이력서' 작가 이대희
  • 강주희 기자 juhee4445@naver.com
  • 승인 2024.03.12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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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의 업적을 긍정적 시각으로 바로 잡겠습니다”
작가 이대희.
작가 이대희.

[경인매일=강주희 기자] <박정희 이력서>의 작가 이대희의 연재물은 5.16 혁명 전후 격동의 현대사를 중심으로 극적으로 전개되고 있어 흥미진진하다.  작가 이대희를 서면 인터뷰했다.

1) 박정희 이력서라는 대통령 평전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저는 행정학과 정책학, 행정사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1948년 이후 우리 한국의 국가 발전 과정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왔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현재처럼 잘 살게 된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의 국가 건설과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발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두 대통령에 대한 세간의 평가나 글들이 너무나 부정적으로 돼있는 것에 대해서 크게 놀랐습니다. 바로 이웃에 있는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추진된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국가 발전에 대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는데, 한국 내부에서는 그저 그런, 독재나 저지른 인물 정도로 폄하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라는 주제로 도서를 검색해 보면 그를 비난하는 좌파 성향의 서적들이 매우 많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적으로 신임했던 부하에게 하극상을 당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스스로 자신의 일생과 업적에 대한 자서전을 남기지 못하셨습니다. 현재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글들을 보면 주변 사람들이 보거나 겪은 입장에서 써져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번 제가 제목을 ‘박정희 이력서’ 라고 정하고 연재를 시작한 것은 박 정희 대통령 본인 입장에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박 대통령의 의도를 정확히 구현해보려고 한다는 것이 매우 겁이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비판적으로, 부정적으로 되어 있는 박 대통령의 업적과 한국의 현대사를 긍정적 시각으로 바로 잡는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진 = 국가기록원
사진 = 국가기록원

2)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 우리가 한국의 역사를 논하면서 훌륭한 역사적 인물로 들고 있는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 그리고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 외적을 물리친 강감찬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 이런 분들이 우리가 내세우는 훌륭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모든 이들을 다 포함한 가장 훌륭한 역사적인 인물이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서기 1년 전후에 시작된 고구려, 백제, 신라 이후에 20세기 중반 대한민국 초기까지 한국은 참으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좁은 농토에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농사나 지어먹고 살아오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 어떻습니까?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 국방 대국, 문화 복지 국가입니다.

대한민국 2000년 역사, 아니 단군 할아버지가 나라를 창제하신 이후 5000년 역사 전체를 들어서도 지금 현재, 이런 순간은 없습니다. 이렇게 된 성공 비결은 오로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입니다.

사진 = 국가기록원
사진 = 국가기록원

3)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장점과 단점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이런 식으로 물으면 장점도 들고 단점도 들어야 해서 그저 고만고만한 사람이 돼 버리고 맙니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역량이나 업적을 100으로 본다면 95 정도는 장점이고 나머지 5 정도가 단점입니다.

그의 장점, 업적을 들다 보면 끝이 안 납니다. 이 5 정도의 단점 속에 3선 개헌이나 유신 정치라는 것이 포함될 겁니다. 박 대통령을 부정하는 좌파, 비판가들은 이 5%를 확대 해석해서 95% 나쁜 것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의 대단한 업적은 5% 정도로 폄하되고 말지요.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사려 깊은 계획 - 과감한 결정 - 온 정성을 다하는 추진력 - 원하는 결과 창출’입니다. 그의 인생에 몇 번에 걸친 급격한 변화가 생겼는데 모두 이런 의사 결정과 실행 과정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것은 그가 주도한 5.16 혁명이었습니다.

- 대통령의 인간적인 장점을 한 두 가지 들어 보자면 그는 세상을 매우 긍정적으로 봅니다. 미래의 목표나 정책, 특정한 인물 등을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미래 희망적이고 적극적이며, 추진력이 놀랍습니다. 어떤 인물을 쓰든지 그 사람의 장점을 선택해서 잘 활용하죠. 대단한 역량입니다.

박 대통령은 매우 서민적입니다. 덩치도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어려서부터 농촌에서 지독하게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농민이나 노동자, 부녀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심, 공감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겪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성격, 더없이 서민적인 모습은 그의 인성이나 체질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좋아하셨죠.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분이셨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멀리하고 싫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와도 편하게 지내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다소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감성적인 부분도 많았습니다. 틈만 나면 글과 글씨를 쓰고 그림도 그리는 등 감성적이셨죠.  

사진 = 국가기록원
사진 = 국가기록원

4)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사상과 국가경영철학은 어떤 특징이 있나요?

- 박 대통령은 국민 모두가 민족적 자아를 가지고, 행복한 자유 민주 복지 국가에 살게 만드는 것을 인생 목표로 삼으셨습니다. 박 대통령은 우리 대한민국을 감싸고 있는 중공, 소련, 김일성의 북한이 모두 공산주의 사상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경계하면서 우리는 철저히 자유민주주의 복지국가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국가 경영 철학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한민족이 수천 년 동안 가난하게 살면서 외세에 자주 흔들리게 된 것은 사색당파로 상징되는 정치적 분열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좀 부정적인 경계의식을 가졌다고 봐야 되겠죠. 그래서 그는 올바른 국가의식을 가진 건전한 젊은이들과 양식 있는 선량들로 국회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안정된 정치 기반 위에서 능력있는 전문 관료들이 국정을 주도해야 만이 국가가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했죠. 국가 건설이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행정 관료들이 정책 과정을 주도하는 행정적 민주주의, 관료제 정부, 관료 정치를 좋게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전제 조건은 부정부패에 물들지 않은 지혜롭고 건전하며 국가와 국민에 대해 충성스런 관료입니다.

5) 박정희 대통령의 출신과 성장배경은 어떻게 그의 인생과 정치에 영향을 미쳤나요?
- 박정희 대통령은 일제시대에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에는 한민족 대부분이 일제의 강압 통치에 억눌려 살아야 했기 때문에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패배주의, 무력감, 열등감,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현명했습니다. 절망감에만 빠져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의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독립 한국의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준비를 했죠.

해방 정국과 자유당, 민주당 정권 시기에 국회의원이나 장차관, 정부 고위 관료 등 한자리를 차지 했던 사람들 중에는 조선시대 양반 가문이거나 일본이나 미국, 유럽 쪽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박 대통령은 오로지 자신의 역량과 고집만으로 성장 과정을 가야 했습니다.

6) 박정희 대통령은 왜 만주국 육군과 일본 육군에 입대했고, 그 시절의 경험은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 일제 시대의 한국인 실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친일이니, 독립 운동이니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 당시에 일본은, 또 일본군은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그런 일본 군대와 국력를 보면서 한민족의 독립이나 미래를 가늠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죠. 박 대통령은 대구사범을 나온 뒤 3년 동안 의무 복무기간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만주 군관학교로 떠났습니다.

문경 시골에서 보통학교 선생님을 할 당시에 그는 일본 천왕이 내려 보낸 황국 신민화 교육 내용과 그들의 교육 방식에 따라서 어린 조선의 청소년들을 교육을 해야 됐습니다. 얼마나 자신의 무기력함을 느꼈겠어요?

조선이 일본에 망한 것이나 3.1 만세운동이 처참하게 제압당한 것은 우리가 제대로 된 군대, 국방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죠. 그런데 국내에서는 전혀 군대나 국방에 대해 공부할 방법이 없었죠. 그래서 만주로 진출하려고 한 겁니다. 당시에 만주는 조금이나마 조선인들의 숨통을 틔워줬던 곳입니다. 우리 독립 운동이 만주를 중심으로 전개되기도 했구요.

박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를 다니면서 철저히 스스로 참 군인이 되었고, 군대의 모든 것에 대해 배우고자 했습니다. 그는 언젠가 도래할 지도 모르는 독립 한국의 군대를 만들 결심에 충만해 있었습니다. 만주군관학교를 마침과 동시에 일본 육사로 진출했습니다. 만주군관학교에서 배운 게 지엽적인 전술(tactics), 소규모 전투 개념의 군대였다면 일본 육사에서는 강대국의 국방, 군대, 전략(strategy) 등 매크로한 것이었습니다.

총칼을 들고 백병전이나 하는 그런 전투 개념의 군대가 아니라 육해공군 합동 전략, 비대칭 무기 체계, 정보 첩보전 등에 대해서 배우고 싶었던 겁니다. 당시 일제는 태평양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투기 등 공군력에 있어서도 대단했어요. 

그래서 그의 만주 군관학교 입학, 그리고 일본 육사 진출 그리고 다시 만주로 와서 군생활을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다가올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를 다한 겁니다. 

근시안적인 사람들은 독립운동가 누가 일본 요인 누구를 암살했다, 누가 어디에 폭탄 투여를 했다 는 등의 단편적인 독립운동에 대해서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설령 독립군 누군가가 일본 천황을 죽이더라도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박 대통령이 만주 군관학교 진출 당시에 혈서를 썼다는 사실을 가지고 비난을 해대는 사람들이 있는데 상황을 잘 모르는 얘기죠. 혈서라는 것은 당시 그의 절실함과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입에 올리는 비난일 뿐입니다. 

7) 박정희 대통령은 왜 남로당 사건에 연루되었고, 그로 인해 어떤 고난과 위기를 겪었나요? 
-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죠. 사람 좋은 그는 누구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함께 술을 먹고 지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북한 공산당 세력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 새로운 대한민국 육사 인맥을 모두 아우르는 매우 중요한 포섭 대상이었죠. 그들은 자신들의 포섭 대상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려놓고 반 협박 겸 역공작을 해서 박 대통령을 몰아 세웠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해방 당시의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가 모두 뒤섞여 있어, 누가 좋은 사람인지, 뭐가 옳은 지 판단하기 어려웠어요. 요즈음 밖에서 국회를 보면 국민의힘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맨 날 싸우는 것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국회에 가보세요. 양당 국회의원들은 서로 만나 시시덕거리고, 식당에서 만나 밥 먹고, 회의할 때 서로 농담하고 이렇게 지냅니다.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상상이 안되죠. 그렇게 뒤섞여 있는 게 정치판입니다. 

당시에 공교롭게 박 대통령이 공산당과 남로당 세력에게 포섭 대상이 됐던 거죠. 아주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듯이 전쟁 직전에 진짜 야무지게 대한민국 국군을 위해서 역할을 하고 있던 차에 애꿎게 사형을 언도받아야 될 정도의 공산당으로 몰렸죠. 근데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박정희라는 인물이 결코 공산당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내노라하는 사람들이 다 구명 운동에 나서서 금방 나왔잖아요. 그런데 그 전력을 가지고, 박 대통령을 몰아세울 때 항상 써먹습니다. ‘너 빨갱이 아니었냐?’

박 대통령은 이미 대구사범학교 시절에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론 같은 책들을 섭렵했어요. 그 어린 나이에도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불만 세력을 충동질하는 얘기들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주 군관학교 시절이나 그 이후의 군인 시절에도 공산당 푸락치들이 불법적으로 준동하는 것을 알고 경계했었어요. ‘일제와 싸운다’는 명분 말고는 형편없는 사상이라고 생각했어요.     

8) 박정희 대통령은 왜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고 그 과정과 결과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나요? 
 - 516 군사혁명은 새로운 국가 건설이었습니다. 정도전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과 같은 심정에서 군대를 동원했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쿠데타니, 혁명이니 말장난을 하지만 대응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김일성 공산당을 추종하는 좌파 세력들은 아직도 1948년 이승만 대통령 건국을 인정하지 않지 않습니까? 지금도 3.1 운동이니, 상해 임시정부니 이런 얘기하고 있죠? 이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통일을 말하면서 태극기를 버리고 한반도기라는 것을 들게 하고, 애국가 제창보다는 님을위한행진곡이라는 것을 부르지 않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은 5.16 군사혁명을 일으키면서 1948년도에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건국한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했습니다. 사라질 것 같았던 국가를 재건(再建)하고자 했어요. 장면 민주당 정부 몇 개월 동안의 카오스 상태가 5.16을 불러 일으킨 것이죠. 박 대통령은 함부로 하극상을 벌릴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참 군인이었습니다. 참고 참다가, 도저히 참아서는 안되겠다 하는 시점에 군사를 동원한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박 대통령이 가지고 있던 위대한 대한민국 건설, 민족적 자아를 갖춘 한국인들이 모두 잘 사는 그런 미래의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목표입니다. 혁명을 하면서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죠. 어떤 정책을 시행하고 어떻게 하면 가난을 벗고 일본을 넘어 세계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동안 이승만과 허정, 장면, 윤보선, 김구, 이 범석, 조병옥 등을 지켜보면서 과연 자신이 그리고 있는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일까 고민했습니다. 적임자가 있으면 그에게 책임을 맡기고 스스로는 뒤로 물러나 지원할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스스로 나선 겁니다. 많이 기다렸죠.  

9) 박정희 대통령은 왜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을 통해 장기집권을 추진했고, 그에 대한 국민의 반응과 저항은 어떻게 대처했나요? 
 - 박 대통령의 험 5%가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와서는 우리가 좀 냉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5.16 군사 정부를 2년 동안 이끌어가면서 박 대통령은 수없이 많은 법률 개정과 혁신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가 민정 이양을 앞두고 고민했던 것은 과연 누가 이 새롭게 시작한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서 성공적인 목표 달성을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왕조나 국가에서도 급진적인 혁신 정책은 반발을 많이 사게 되고, 굉장한 공격을 받게 됩니다. 혁신 담당자가 물러나면 금방 원위치 되고 없어집니다. 민정 참여를 결심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고민의 결과였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은 불과 몇 년 만에 같은 혁명 동지였던 이성계의 아들한테 살해당했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민주주의 국가였다고 하는 송나라 있지요? 송나라는 평화와 자유 민주만 생각하다 보니까 북쪽에 있던 거란 요나라와 서쪽에 있던 대하의 군사적 침략을 받게 되자 엄청난 양의 돈을 주고서 평화를 유지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폐해가 엄청나서 국가가 위축되고 나라가 망할 정도가 됐죠. 이때 등장한 게 여러분들 아시는 왕안석이라는 대단한 혁신가, 행정가였습니다. 이 왕안석의 능력을 지켜본 송나라 신종은 절대적으로 신임을 하면서 왕안석한테 7년 동안 혁신정책을 펼 수 있게끔 해줬습니다. 정치적 뒷배가 든든한 상태에서 왕안석은 최고의 혁신 정책을 펼쳐 국민을 살아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신종이 세상을 뜨자마자 불과 1〜3년 만에 모든 정책이 원위치 됩니다. 이게 혁명, 혁신이라는 겁니다. 

혁명 정책의 완성이란 게 얼마나 어려운 가에 대한 좋은 예가 조선 시대의 대동법 입니다. 난장판이었던 공물 제도를 바꿔보려던 김육의 대동법은 이 조그만 나라 조선에서 백 년이 걸려서도 완성을 못합니다. 말이 안되죠. 확실한 소신을 갖춘 국왕이 없었던 겁니다. 

박 대통령이 걱정했던 것은 정치가 굳건하게 뒷받쳐 주고 그것을 배경으로 행정, 정책이 일관성 있게 10년, 20년, 30년 추진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었죠.

국가 건설기와 경제 발전기였던 1940년대, 1950년대, 1960년대 대한민국 헌법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최고 통치권자의 리더십이 4년 단위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민주적인 미국식 헌법 시스템을 들여오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인데요. 이 부분이 박 대통령이 3선 개헌, 유신 체제를 그토록 욕을 먹어 가면서까지도 추진해야만 했던 원인이기도 합니다. 

아시잖습니까?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선진국 미국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을 4선을 시킵니다. 전통적인 관례에 어긋나는 거지요? 하지만 미국인들은 전쟁 승리를 위해 리더십 체인지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6.25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952년도 부산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끌어내리는데 열중했습니다. 당시 상황이 이해되시죠? 북한의 김일성은 종신 위원장이 돼서 전쟁을 치르고 있고, 그 뒷배인 중공이나 소련도 최고통치권자의 임기가 없을 정도로 장기 집권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사실 민주당 집권기에 도입했던 내각책임제 정부 형태였다면 3선 개헌이나 유신 체제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국회 다수당만 잘 유지하면 행정 수반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고 장기 집권이 가능했을테니까요?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자신이 추진하는 국가 발전 전략, 정책들은 안정된 정치를 기반으로 30년 가까이 추진되어야만 원하던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 대통령이 장기 집권한 것에 대해서 미워하고 있는데 사실 본인 입장에서는 언제, 어떻게 권좌에서 내려설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집권 기간 어느 한 순간도 국가 위기 상황이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야당이 집권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 적지 않은 정책이 일관성을 상실할 운명에 처해있었어요. 국가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지요.

10) 박정희 대통령은 왜 경부고속도로, 서울 지하철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농촌현대화, 산림녹화, 식량자급, 자주국방 등의 국가근대화 정책을 추진했고, 그로 인해 어떤 성과와 부작용을 낳았나요? 
 - 너무 많은 정책에 대해 한꺼번에 묻는군요. 이런 정책들은 파급 효과가 매우 큰 것들입니다. 하나하나의 정책들이 우리 한국의 운명을 바꾼 것들입니다. 국가 발전 과정에서 각 단계에서 꼭 필요한 정책들인데 이런 정책들이 없었다면 총체적인 국가 발전이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겁니다. 정책적 혜안과 미래를 보는 현명함이 없다면 어느 한 가지도 추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11) 박정희 대통령은 왜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고 그 과정과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 우리의 핵 개발은 이 승만 정부시절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등 선진국에서는 핵 개발과 더불어 우주선 발사 경쟁에 들어섰습니다. 우리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에너지 문제 해결 차원에서도 핵개발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전쟁 무기 차원에서는 핵은 비대칭무기체계의 최상위에 자리합니다. 당시 중공과 소련이 적극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선 상황에서 북한도 이들 국가의 지원을 받아 핵무기 개발 가능성도 있었고, 중공과 소련으로부터 직접 핵무기를 들여올 가능성도 높았습니다. 근데 우리 한국의 경우에는 미국이 핵무기 개발을 원천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박 대통령 마음대로 핵무기를 개발할 수 없었지요. 
 

지금 현재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완료했다고 한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금 핵무기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죠. 핵무기의 위력을 세계 제2차 대전에서 똑똑하게 보았던 박 대통령 입장에서도 우리가 핵 보유국이 되는 것은 절실했습니다.

이때 미국의 강요에 굴복치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도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처럼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미국의 강압으로 핵무기를 포기하긴 했지만 우리의 핵개발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중에 도달해서 핵발전소 수출로 큰 덕을 보고 있어요.

12) 박정희 대통령은 왜 한일 기본조약과 한일 청구권 협정을 체결했고, 그로 인해 어떤 이익과 피해를 입었나요? 
- 당시에 한국과 일본의 조약 체결은 자유민주국가 계열과 공산국가 계열간의 치열한 냉전 상황에서 하루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만 할 긴급 안건이었습니다. 한일간의 조약 체결을 가장 반대한 것이 북한의 김일성이었거든요. 우리가 일본과 앙앙불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김일성은 끊임없이 한국 사회 혼란을 부추겼고 정치적으로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일제 침략을 받고, 35년 동안 지배를 받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협상안을 내놔도 불만인 한국인이 있게 마련이었어요. 건국 직후부터 시작된 협상이지만 해결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죠.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 확보도 필요했고,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오래 끌게 되면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보게 되어 있는 상황 맥락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손해를 볼 상황에서 최선의 협상안을 마련하고 마무리를 지은 겁니다.  

한일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면 네가 한번 해 봐라’ 해 봅시다. 해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아니 중공처럼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금방 끝이 나겠죠.  

13)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추구했고, 그로 인해 어떤 기회와 위험을 마주했나요?
  - 박 대통령은 북한과 우리 한국은 국가 시스템 자체가 원천적으로 이질적이어서 대화라든가 통일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왔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이 장기집권을 하면서 끊임없이 우리 한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한국 사회와 정치판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막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요즘 와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가장 화가 나는 것 중에 하나는, 이렇게 전 세계 10위권 대국 대한민국을 북한의 김정은은 여전히 국가로도 인정을 안 한다는 겁니다. 아, 이게 말이 됩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그 뵈기 싫고 증오스런 김일성과 대화와 협력을 추구했다는 얘기는 그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에 대한 간첩 침략, 정치사회 혼란 조장, 휴전선 일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군사적 대립을 조금이라도 완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14) 박정희 대통령은 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그로 인해 어떤 영광과 비난을 받았나요?
 - 박대통령의 월남 파병은 절묘한 묘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경제 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월남전 참전에 따른 경제적 이익, 외화 획득 때문입니다. 당시. 우리는 60만 명이 넘는 군인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 지 10년 이상이 지나가면서 전쟁을 치러 본 군인이 장교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군인들 숫자는 많았지만 실전 경험이 전무했던 거죠 그런 상황에서 실전 경험을 쌓고, 또 미국이 어려워하던 군대 파병을 도와준거죠. 우리는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제공받았고, 실전에 사용할 수 있었어요.

 월남과 우리 한국은 공산주의로 인해서 국가가 둘로 나눠져 있었고, 북쪽에 있는 공산당으로부터 끊임없는 간첩 침략과 전쟁 도발, 정치사회 혼란 조장 등의 피해를 보고 있었죠. 그래서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월남과 그 대통령에 대해 공감대를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월남 참전으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된 이익은 참으로 컸어요. 앞서 얘기했던 전쟁 실전 경험을 쌓는 것, 또 미국으로부터 좋은 무기 지원을 받은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 군인들이 미군의 70% 수준에 달하는 봉급을 받게 된 거죠.

한국군인은 의무 복무를 하다 보니까 거의 무보수로 군복무를 하는 중인데, 박 대통령이 노련한 협상을 통해서 미국 군인들 봉급의 70% 수준에 달하는 높은 근무 수당을 받게 되었던 거죠. 그 봉급은 전쟁판에서 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돈이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국내에 있는 부모 형제들이 그 돈을 소비 지출에 쓰게 됐지요. 

그리고 또 하나 박 대통령이 적극 추진한 게 Buy Korean 정책입니다. 그러니까 한국군이 월남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본적인 물자들을 전부 한국서 생산해서 조달하도록 만든 겁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전쟁 비용을 지불하니까 반드시 미국물품을 사용하도록 합니다. 그게 Buy American 정책입니다. 박 대통령이 대단한 협상력을 발휘해서 한국에서 제품 생산을 해서 월남으로 보내게 됩니다. 한국에서 경공업 제품 생산이 급증했어요. 

미국의 경제 차관 등 원조 증가, 태릉 과학기술원 건립, 현대 건설 등의 전후 복구 참여로 인한 경제적 기술적 이득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런 여러 효과 때문에 베트남전은 한국 발전의 일등 공신이 된 겁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국인 일본이 3년 만에 깨어난 것도 한국 전쟁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박 대통령께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15) 앞으로 단행본과 다큐 드라마를 제작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다큐물에서는 어떤 점을 강조하실 예정입니까?
- 조심스럽습니다. 현재 집필 중인 박정희 이력서가 어느 정도는 독자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데요. 어쨌든 박 대통령 본인의 입장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해보려고 합니다. 

■ 저자 : 이 대 희 (李大熙, Daehee Lee)
 ‣ 아호(雅號): 늘보. 정이(精而). 이재(頤齋)
 ‣ (학력) 청주고. 서울대 행정학 박사(정책학 전공)
 ‣ (경력) 광운대 교수. 한국행정학회,동양고전학회,서울행정학회 회장 역임
      행정사연구회 회장. 서울북부경실련 공동 대표. ‘정부기관’ 자문위원
      (재)한국산림복지문화재단 이사장. (사)한국산악문화협회 이사장(현)
      「포럼 감성과 문화」 대표(현). 한국범죄연구원 원장(현)
 ‣ (저서) 「감성정부」 「정책가치론」 「문화산업론」 「인성」 「한국적인식론」
      「감성혁명과 정부재창조」 「행정(공저)」 「행정사(공저)」 「새행정학(공저)」
      Emotional Revolution and Government Reinvention
      「한국정부론(공저)」 「한국발전모형」 
      「문화학Ⅰ:문화학」 「문화학Ⅱ:문화와 인류」 「문화학Ⅲ:문화와 자연」
      「문화학Ⅳ:문화와 예술」 「문화학Ⅴ:문화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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