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민족주의자 김구
철저한 민족주의자 김구
  • 이학근 논설위원 kmaeil@
  • 승인 2007.07.0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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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6일은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이 포병소위 한국군인 안두희에게 저격당하며 서거하신지 58주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애국적인 인사들이 그리고 모든 국민들이 존경해 하지 않는 순수한 백범정신은 무엇인가. 먼저 백범 김구(1876~1949)정신을 논할때 그 순수성을 들고 있다. 그분의 70평생이 한결같이 ‘애국애족’ 이라는 말로 표현할수 있는 것은 그 순수성에서 찾아야 될것이다. 그는 한벽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양반인 체하는 위선이나 허세를 가장 멀리 한분이다. 집안이 몹시 가난함이나 또 양반집안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하며, 그것은 모두 정직(正直)을 전제한 순수성이라고 지적한다. 그당시 양반·상인 구분이 공사간 심하고 거리감이 많았던 그때 신분을 숨김없이 밝혔다는 것은 순수성을 간직한 인격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라 한다. ‘저런 천한 상인(常人)신분으로 일국의 지도자로 추대 할수 있겠소’ 하였을때 백범은 태연 자약하게 ‘현대의 양반은 희생적인 애국활동을 얼마나 순수하게 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소’ 라고 하였다 한다. 훌륭한 인물뒤에는 반드시 그보다 더 훌륭한 어머니가 있는 법인것 같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1859~1940)여사는 현명한 어머니와 지혜로운 부인으로서 그의 능력은 80 평생 종횡무진하게 펴온 민족의 어머니 이자 애국투사이기도 한분이다. 17세의 김구는 과거시험장의 풍토에 환멸을 느끼고 포기했다. 그는 18세때 동학(東學: 경주사람 최제우가 창건한 민족 자주자립정신 운동사상)에 입문하여 점주가 된뒤 정부의 불의, 부정, 부패에 항거하는 1894년의 동학혁명때 19세로 반봉건 운동과 민중구국 운동에 참여하였다. 어머니 곽여사는 소망한바 달랐으나 나라를 위한 일에 투신하는 아들의 가륵하고 신념있는 행동에 만족을 표하고 오히려 후원해 주기까지 했다. ‘ 어떤일을 하던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면 계속 신념있게 추진하라’ 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김구는 경성 지방 재판소에서 징역 17년을 먼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자 면회간 어머니 곽여사는 김구를 보고 ‘경기 감사로 임명된 것보다 더 기쁘다’ 격려하는 등 선구적이고 혁신시장을 가진지조 있는 신념의 어머니 였다. 회갑잔치를 마련해 주겠다는 김구 내외에게 ‘지금은 이렇게 어려운 때인데 내가 잔치상을 받는데서야 어찌 나라의 국민이라 하겠느냐’ 고 물리쳤다. 이처럼 훌륭한 어머니 이었기에 김구와 같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가 탄생할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백범은 애국 사상은 정직속에서 싹 텃다. 남을 속이는 자는 곧 자기 자신도 속이는 가장 비열한 인간임을 지적하고 성실과 근면성을 강조하였다. 1911년 1월 5일 105인 사건 주모자 혐의로 체포되어 왜국의 취조관에 일본의 그릇된 점을 설명한뒤 ‘너희놈들이 차라리 우리나라를 침략하겠다고 정직하게 말한다면 덜 밉쌀  스럽겠구나. 무엇이 동양 평화를 위하는 것이며 이렇게 수작 부리는 것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냐?’ 고문 받으면서도 바른말을 쉬지 않았다 ‘정적한 민족이나 개인은 그 생명이 영원한 것을 나는 확신한다’ 강조했고 ‘이놈들 좀 정직하고 떳떳한 마음을 갖도록 하라. 일등 국민이라는 자가 거짓 투성으로 동양세계를 손아귀에 넣겠다고 발버둥 치느냐!’ 백범의 음성은 이웃방까지 쩡쩡 울려 펴졌다. ‘나는 왜놈의 포로가 되어 징역살이를 하고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왜놈을 짐승같이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낙천적이고 정직한 생활을 영위하리로다’ 남이 싫어하는 감옥에서 청소부를 자청하여 옥내 분위기를 일신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13일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국내로 부터 들어와 합류하였다. 그는 이동녕 초대 임시 의정원 의장과 도산 안창호의 추천과 권유에 따라 임정의 경무 국장이 되였다. ‘독립정부가 생기면 나는 그 청사의 청소부가 되어도 기꺼이 행복할것이다’ 백범등 상해 임정 지도자는 국내외에 공개장을  계속 보내 격려하는가 하면 일제(日帝)에의 납세 거절이나 조직적인 저항운동을 고무해 주었다. 백범의 사상이 진솔하게 표현된 ‘백범일지’를 보면 김구의 애국사상이 얼마나 깊은것인가를 알수 있다. ‘우리민족으로서 해야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민족의 생활을 보장할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의 복락을 누릴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라고 술희하였고 백범의 사상은 ‘민족의 통일, 자주독립과 세계평화의 구현이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ㅇ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희원하는 것이 아니다. 남의 침략에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한평생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돌아온 그에게 민족 자손 ㅻ에 저격당하여 서거한 것이 군정시대이니 소련이냐 미국이냐 북한이냐 남한 반대 세력이냐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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