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칼럼] 126년 전 구중궁궐에 피바람
[덕암 칼럼] 126년 전 구중궁궐에 피바람
  •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1.08.1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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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126년 전 1895년 8월 20일 새벽, 주한공사 미우라는 수십 명의 일본인 낭인과 일본 수비대를 하수인으로 고용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 날이다.

영화 명성황후에서 “나는 조선의 국모”라며 고고한 자태로 큰소리치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국민들의 인식속에 심어진 이 모습은 반일감정에 또 다른 불씨 역할을 했고 타국의 궁궐에 난입하여 왕비를 시해한 사실에 대해 내부 속사정을 떠나 조선의 백성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을미사변의 내막과 당시 상황은 이미 많은 고증을 거쳐 역사적 비극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해져 왔으나 딱히 어느게 진실이고 어느게 정확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게 당사자인 민 비의 사진조차 진위 여부에 논란이 많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민비의 폭정이 어찌되었고 당시 조선의 내정이 혼란스러웠든 간에 일본인의 칼에 자국의 왕비가 살해 당했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도 지나칠 수 없는 중대 사건이었다.

민비의 본명 민자영, 고종의 부인이자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며느리로서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고종을 가운데 두고 십 수 년간 벌인 권력다툼에 죄없는 백성들의 살림만 피폐해졌다.

고종 입장에서는 아내 편을 들자니 불효자가 되는 것이고 아버지를 생각하자니 부인에게 들볶일 일이 장난 아니었던 것이다.

고종의 잘못된 통치로 나라 살림이 엉망이 되고 참다못한 의병이 일어나자 왜군을 끌어들여 자국민을 살육한 나라였다.

일각에서는 오죽하면 들고 일어났겠느냐 주장도 있었지만 나라 내부적 일이고 외국에서 타국의 궁궐에 난입하는 일은 별개 문제다.

어쨌거나 당시 일본인들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조서에 서명을 강요하는가하면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화장했다.

100일이나 지난 12월 1일에야 고종은 정식으로 명성황후가 승하했음을 발표했고 이때부터 상투를 잘라내는 단발령과 건양 연호의 사용, 친위대·진위대 등으로 군제 개편, 소학교령 공포, 태양력 사용 등의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말이 개혁이지 사실상 식민지로 가는 전초전이었다. 그렇게 조선을 호구로 본 일본이 러시아와 대판 맞짱을 뜨고 나니 눈에 뵈는 게 없어진 것이고 전쟁의 길목으로 잠시 자리 좀 쓰자던 일본이 아예 주저앉아 점령하였으니 이때부터 조선의 멸망은 시작된 것이나 진배없다.

10년도 지나지 않아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강제체결부터 시작된 조선의 붕괴는 5월, 대한방침·대한시설강령 등 새로운 대한정책으로 이어졌고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으로 분야별 실권을 박탈당했다.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체결로 조선식민의 승인을 받았고,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 체결에 이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서 주변 열강들의 묵시적 수락을 거친 셈이다.

이제 다 잡은 고기인 조선에 수저만 얹어놓으면 되는 시기, 과연 이때 조선의 내부적 반란과 조선을 팔아먹으려는 일당이 양분되었으니 국권상실에 이은 백성들의 수난은 불보듯 뻔한 것이다.

그해 10월 포츠머스 회담에서 보호조약을 체결할 모의를 하고 11월 한일협약안을 한국정부에 제출했다.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는 형식적인 왕에 불과한 고종에게 인사를 하면서 조선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너는 가만있으라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15일 조정에서 1차 반대를 했지만 17일 일본공사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사실상 윽박지름의 연속이었다.

국권을 내놓으라고 빚쟁이가 돈 독촉하듯 졸라대는 형국이다. 한일합방 체결을 위한 어전회의에서 한규설과 민영기는 적극 반대했지만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서 이를 ‘을사오적’이라 한다.

이렇듯 일촉즉발의 숨 막히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했으리라. 요즘 국제사회에서 이목을 끌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의 점령보다 더 살벌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당에 던져진 고기를 주워 먹으며 개처럼 짖어주었던 상갓집의 개 이하응은 하루 아침에 아들 고종을 옹립하면서 섭정으로 인한 실질적 왕이 되었고 일가친척이 없어 외가세력의 대립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계산속에 착하고 어린 민자영을 며느리로 들였을 때만해도 이런 피바람이 불 것이라곤 상상이나 했으랴.

민씨 일가가 한 번씩 권력을 차지했다가 대원군파에 밀려날 때마다 얼마나 피의 숙청이 반복되었던가.

권력의 이동은 그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불안정한 시국에 토호세력이 날뛰고 안정되지 못한 권력구조를 틈타 너도나도 가진 권력으로 해먹기 바빴으니 무슨 부국강병이고 태평성대를 꿈 꿀 수 있었을까.

결국 힘없는 백성들만 아리저리 피폐한 살림에 죽지 못해 산 것이다. 세월이 126년이 흘러 2021년 8월 20일 지금은 아니라 하고 싶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있고 없고와 소달구지 대신 승용차들이 즐비하다는 것, 그 외 권력이 서로 자신들만이 대안이라며 침을 튀기는 것이나 정당간 싸움질과 비난과 성토에 하루도 조용할 날 없다는 건 같은 모양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국의 군인이라도 끌어들여 자국민들을 무참히 살육한 민족이었다는 것, 그런 일들이 반복될까 두렵다.

여차하면 당장 만나고 있는 코로나19가 바이러스와 경제적 한파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가져올는지 아니면 서로 대통령하겠다고 아우성칠 때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유사한 일이 벌어질지 한치 앞의 미래를 볼 수 없는 현실이 미래를 우려스럽게 한다. 

김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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