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돈의 기자수첩] 슬픈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창경궁 궁 해설 나들이, 다시 한 번 찾아가 보리
[이익돈의 기자수첩] 슬픈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창경궁 궁 해설 나들이, 다시 한 번 찾아가 보리
  • 이익돈 기자 mickeylee@naver.com
  • 승인 2023.02.20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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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익돈기자
 ▲이익돈기자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 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은 세종 즉위년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 왕궁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문화재청의 창경궁 소개 자료에서 인용)

지난 주말에 특별한 창경궁 나들이를 다녀왔다. 산림교육전문가 교육 동기생이 궁궐지킴이 창경궁해설사로 봉사하고 있어 스무 명 가까운 동기생들이 봄나들이를 다녀온 것이다.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김홍인 궁궐지킴이의 해설에 1시간 반을 훌쩍 넘기며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김홍인 동기생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가까운 대학로에서 티 타임을 가지고 온 복된 날을 떠올리며, 잠시 창경궁을 소개해본다.

조선시대의 5대 궁궐 중 3번째로 지어진 창경궁은 창성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을 지닌 이름이다. 지형상 요인(남서북 지형이 높고 동쪽이 낮음)을 활용해서 지어진창경궁은 정문과 정전이 남향인 여느 궁과는 달리 동향을 하고 있다. 정전까지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 데, 이는 두개의 문만 지나면 정전에 닿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전과 문의 축이 약간 비뚤게 축을 이루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창경궁은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자연지세를 활용하여 지어도 무방하리라 생각되었다고 한다.

창경궁에는 광해군이 중건한 명정전, 왕이 일상 업무를 보았던 문정전, 독서나 국사를 논하던 숭문당이 있다. 또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 대비와 세자빈, 후궁들의 처소로 쓰인 곳이며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경춘전,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순조가 태어나 돌잔치와 관례(성인식), 책례(세자책봉식) 등이 열렸던 집복헌 등의 내전이 특히 넓게 자리하고 있다. 특히 정조 가족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희로애락이 깃든 곳이기에 인생무상, 삶의 애환이 느껴지는 곳이다.

보물을 7점이나 간직하고 있는 창경궁은 일제강점기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이 지어지고 오락시설을 갖춘 유원지로 바뀌면서 일반에게 개방되었고, 1911년에는 창경원으로 격하되면서 이름과 함께 역사의 아픔이 간직된 곳이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고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즐거움을 맛보기도 했던 장소이다. 많은 전각들이 헐리고 수천 그루의 벚나무가 식재 되었으며 1924년부터는 밤 벚꽃 놀이가 열리기도 했다.

1983년부터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창경궁 이름을 되찾고 동물원은 과천 서울 대공원으로 옮겨지고, 벚나무는 여의도 윤중로로 옮겨졌지만, 현재는 본래 궁의 약 20%만 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창경궁 정문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다. 궁궐 사람들이 출입했던 문은 아니고 영조와 정조 때 홍화문 앞에서 어려운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기(賜米) 도 했다고 한다. 홍화문과 함춘원(현 서울대학교병원) 사이의 너른 공간에서는 무과 시험과 무인들의 활쏘기 대회가 열렸던 기록이 있다는 곳이다.

창경궁을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작은 다리인 옥천교(玉川橋)는 성종 때에 지어진 530년이 넘은 돌다리이며, 다리 아래로는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자연수가 흐르고 있다. 옥천교 아래 작은 개천이 흐르는데 일반인들은 여기를 넘어서지 말라는 의미와 신하들이 궁궐을 들어올 때 몸을 깨끗이 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명정문은 광해군 때 지어졌으며, 왕의 출궁과 입궁의 경계 지점이라 한다. 궁내에 서는 여(輿)라는 의자 형태의 가마를 타고, 임금님이 출궁할 때에는 연(輦)이라는 사방이 가려지고 지붕이 있는 가마로 갈아타시는 곳이다.

정전 앞의 조정은 공식적인 의례 행사가 행해지던 곳으로 대신들의 신년하례식, 가례식, 왕의 즉위식이나 세자 책봉식, 외국사신 맞이, 과거를 볼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바닥은 울퉁불퉁한 박석으로 드문드문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아졌는데 이는 물 빠짐과 미끄럼 방지, 햇빛 반사로 인한 눈부심 방지를 위한 것이라는 해설을 들으며 새삼 옛 어른들의 지혜에 감탄하기도 했다.

품계에 따라 높은 대신들을 대감 마님, 영감 마님, 나으리 마님으로 불리웠다는 것도 재미있었다. 물론 임금님은 상감마마라 불리기도 했다. 용상 뒤로 일원오봉병日月五峯屛)이 있는데, 오늘 날 만원 권 지폐 뒷면에서도 볼 수 있다. 일월오봉병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림 속의 여러 상징물을 통해 왕의 덕을 찬양하고 왕실의 번창과 나라의 영원 발전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궁궐이나 절에서 볼 수 있는 놋쇠로 만들어진 큰 방화수 그릇인 ‘드므’는 소화(宵火)를 위한 것이기 보다, 귀신이 물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 놀라 달아나라는 상징적이며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문정전은 편전이며 특이하게도 사각 기둥으로 지어진 곳으로 국상이 났을 때, 장례 후 혼전(魂殿)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고 한다. 창경궁은 정조의 탄생 등 정조의 여러 애환이 얽힌 곳으로 비운의 ‘사도 세자’와도 인연이 많은 곳이다.

영조가 41세 늦은 나이에 얻은 두 번째 왕자가 사도세자이다. 첫째 왕자가 9세 이른 나이에 요절하자, 조선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세자책봉을 받아 왕과 어미의 품에서 떨어져 어릴 때부터 사랑받기보다는 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게 되었고 사도세자는 매우 총명했지만 불행했다고 전해진다.

영조는 세자에게 늘 엄격한 교육과 지침을 하달했고, 영조의 욕심으로 꾸지람이 끊이지 않자 세자와 영조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고, 더 나아가 마침내 영조는 왕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었고, 사도세자는 8일째 날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도세자가 숨을 거둔 곳이 바로 창경궁이며 뒤주가 놓였던 곳이 바로 문정전 앞뜰이다. 후에 영조는 슬픔을 생각한다는 뜻의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봄이 오는 햇빛 따스한 날 오후, 창경궁에서 만난 파릇파릇한 봄 빛과 새 소리와 함께 여러 슬픈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창경궁 궁 해설 나들이, 봄이 오면 다시 한 번 찾아가보고 싶어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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