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73년 전 오늘이 있었기에
[덕암칼럼] 73년 전 오늘이 있었기에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3.09.1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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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7월 27일 휴전 기념일에 맞춰 개봉했고 110분의 상영시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들이 당시 한국전쟁의 참상을 충분히 연상케 하는 내용들이었다.

그에 앞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기까지 보이지 않은 첩보작전에 대해서는 많은 국민들이 모르고 있었다.

영화 내용에도 담겼듯이 인천상륙작전 직전 대한민국 해군 정보국 첩보대가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영흥도를 거점으로 북한군의 해안포대 위치와 병력 배치 상황, 해안 방어 태세 등을 파악한 작업을 엑스레이 작전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홍보를 수십 년간 묵묵히 자원봉사로 일관하는 점에 대해 필자가 1년 전 작성한 덕암 칼럼에서 이를 널리 알린 바 있다. 1년이 지난 현재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화인협회가 구성되어 엑스레이 작전의 영화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상당 부분 진척되고 있어 기대가 크다.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은 조수 간만의 차를 아침저녁으로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제주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서해안의 섬 아닌 섬이다.

약 300개가 넘는 펜션과 280곳이 넘는 식당, 고깃배들이 모여 있는 진두항을 비롯해 낙조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경리, 십리포 해수욕장의 풍경은 어촌마을에 주어진 하늘의 선물이지만 21년 전만 해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가깝고도 먼 곳이었다.

2001년 11월 15일 영흥대교가 개통됨으로써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섬 자체가 관광지다 보니 다양한 요소들이 산적해 있다. 그중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해군 전적비다. 6·25 전쟁 당시 영흥도에서 발생한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전적비로 해변에는 해군 퇴역함 263호정 참수리호가 정박해 있다.

유효사거리 2km, 탄약 2.3톤, 발사속도 약 1,500발, 1978년 대우조선 해양에서 선보였던 참수리호는 대간첩 작전의 필수적인 역할을 해 왔다. 시간을 73년 전으로 되돌려 영흥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함께 짚어보자.

당초 이 작전은 극비밀리에 준비된 군사작전으로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극동군 사령부가 인천 100-B, 군산 100-C, 주문진 100-D 등 3가지 시나리오 중 100-B가 선택됐다. 날짜는 만조가 가득한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 중 가장 최적의 날짜로 9월 15일이 선택됐다.

9월 9일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승인된 인천상륙작전은 9월 5일부터 북쪽의 평양에서 남쪽으로는 군산까지 길게 해안선에 폭탄을 투하하며 대대적인 공습을 펼쳤다. 9월 12일 영국군이 군산을 공격하고 동해안에도 삼척 일대에 대량의 폭탄을 퍼부었으며 D-day가 임박한 12일에는 월미도에 대한 포격이 이어졌다.

9월 15일 오전 2시 정각,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3년 전 261척의 군함과 7만 명의 연합군이 먼저 월미도를 점령했고 이어 인천시를 향해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펼쳤다. 성공 확률 5천분의 1, 맥아더 장군의 집요한 주장으로 기적은 성공했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포성은 멈췄지만,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보이지 않는 영웅들은 지금 와서 재조명되고 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생동감 넘치는 장면이 그러했고 북한군의 정보를 교란하기 위해 포항의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 그러했다.

이명준 대위가 이끄는 어린 학도병들의 무모한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의 교란은 성공했다. 평균 나이 17세, 요즘 학생으로 치자면 고등학교 1학년인 셈이다. 2주간의 훈련, 772명의 고귀한 젊은 청소년들은 그렇게 총알받이나 다름없이 전쟁터의 희생양이 됐다.

남북을 합쳐 300만 명이 사망한 전쟁,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뒤에는 해군 특수첩보대가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 서울, 수원까지 잠입한 일명 엑스레이 작전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항공촬영이나 통신으로는 알 수 없는 적의 모든 동태와 장비, 병력 배치를 이 첩보원들이 목숨 걸고 파악해 정보를 제공했다. 지금은 관광지이지만 당시에는 임무 수행 중 북한군에게 발각된 영흥도는 피바람이 불었다.

당시의 전황을 살펴보면 대원들을 피신시키고 최후의 일각까지 적과 대치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친 임명래 중위, 홍시욱 하사는 적에게 포로가 될 경우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가 누설될 가능성을 알고 스스로 자결을 선택했다.

위대한 영웅의 순국이 지금의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내는 소중한 동기로 남았다. 켈로부대로 불린 이들은 어민으로 가장해 서해안 도처에 설치한 기뢰의 위치도 찾아냈고 결국 목숨을 버리고 나라를 선택했다.

그리고 석 달 후인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미 제10군단이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했다. 대한민국이 극적으로 살아난 인천상륙작전의 결과였다. 거대했던 작전이었던 만큼 성공 이면에는 당연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당초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했던 장소도 인천이었다. 인천에서 출발해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지금의 대한민국을 지켰다. 얼마 전 인천 차이나타운 공원 꼭대기에 설치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찾아보았다.

누구나 언제든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곳, 지금은 생을 다해 만날 수 없지만 파이프 담뱃대를 입에 물고 선글라스를 낀 맥아더 장군의 모습은 많은 국민들에게 충분히 각인돼 있다.

세월이 훌쩍 지나 인민해방을 외치며 대대적인 야간열병식을 개최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달라도 너무 달라진 대한민국 국방부와 비교해 볼 때 저승에서 맥아더는 무슨 생각을 할까.

적어도 어렵사리 지켜낸 한반도의 남쪽 안보가 참으로 염려되지 않을까. 자칫 이날의 무모한 도전이 없었다면 지금쯤 한반도는 공산주의 독재 체제하에 야간열병식 연습을 해야 하는 지구촌 최악의 시나리오에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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