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재의 문학산책] 조흔파와 명랑소설 『얄개전』
[박상재의 문학산책] 조흔파와 명랑소설 『얄개전』
  • 박상재(한국아동문학인협회 이사장) kmaeil86@naver.com
  • 승인 2023.09.2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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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흔파(趙欣坡1918~1980)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얄개전』은 1954년 5월호부터 1955년 5월호까지 학생잡지 <학원>에 연재되어 인기를 끌었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 후에 천막수업 등으로 고난을 겪던 시절 청소년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던 명랑소설의 대명사였다.

‘얄개'는 사고는 치지만 밉지 않은 말썽꾸러기를 뜻하는 말로 함경도 사투리에서 유래하였는데 처음에는 제목을 '도련님'이라고 지으려고 하던 것을 함경도 출신의 아내 정명숙 수필가의 제안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원래 3회로 계획하고 연재를 시작했지만 첫 연재부터 폭발적인 호응에 힘입어 총 11회를 연재했으며 <학원> 1954년 7월호는 8만부가 팔려 당시 한국 잡지 역사상 최고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조흔파의 본명은 조봉순(趙鳳淳)이다. 필명 흔(欣)은 기쁠 흔 자로 기쁨이 물결치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그는 평양 판동(염전리)에서 부친 조창일과 모친 양창신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상업으로 성공한 기독교 장로였고, 모친은 권사였다. 평양의 기독교 학교를 졸업한 조흔파는 신학을 전공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난다.

조흔파는 유치원부터 고등보통학교까지 아버지가 재단이사로 재직 중인 미션스쿨에서 자유로운 학교 생활을 보냈으며, 본인 스스로 여러 번 퇴교 처분의 물망에 오를 만큼 성실하지 못한 학생이었다.

그는 신학대신 동경에 있는 셴슈대학(專修大學)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유학시절 일본의 아동문학가 사사키구니(在在木邦)의 학원소설을 접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마크트웨인의 소설에 관심을 보여 그의 대표작인 『톰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킨의 모험』을 번역하기도 했다.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1942년 경성방송국 촉탁직으로 근무하다 해방이 되자 아나운서 공채에 응시하여 아나운서가 된다.

1947년 5월 방송일을 그만 두고 경기여고와 휘문고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문관겸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1951년 <고시계>에 소설「계절풍」을 발표하고, 1953년 첫작품집 『청춘유죄』를 간행하면서 작가활동을 시작하였다. 1954년 <현대여성> 주간으로 근무하고, 1957년부터는 <국도신문>, <세계일보> 등에서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1960년 4‧19 이후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자 공보실 공보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KBS 중앙방송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필명은 문예지 <백민>에 「종소래」를 발표할 때 김억과 정비석이 봉순이라는 여성 이름보다는 흔파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붙여졌다. 그는 1956년 정명숙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말년에 서대문구 남가좌동에서 살다 198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향년 62세를 일기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영면했다.

정명숙은 남편의 삶에 대해 흔파는 하루 4시간 수면에 글 쓰고 술 마시는 시간이 아니면 라이카 카메라 메고 다니며 연애하는 시간이었고, 가난뱅이 문인친구들이 집에 찾아오면 교통비까지 주어 보내며 아내의 결혼반지까지 빼 주었다고 회고한다. 이처럼 흔파는 낭만가이였고 정이 넘치는 문인이었다. 그가 남긴 도서와 자필원고, 유품은 역삼동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조흔파 개인문고에 보전되고 있다.

조흔파는 1950년대 중반 이후 1970년대까지 청소년소설, 수필, 방송극본, 가요작사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한 만능 엔터테인먼트였다. 『얄개전』 외에도 『고명 아들』, 『배꼽대감』, 『에너지 선생』, 『꼬마전』 등을 상재하여 독서물이 빈곤하던 당시대 청소년들에게 풍부한 읽을거리를 제공했고, 라디오 드라마 <주유천하>(양녕대군의 일대기를 다룬 사극, 후에 영화화)등 희곡 70여 편과 가수 문주란의 희트곡인 <돌지 않는 풍차>(박시춘 작곡) 등 유행가도 여러 곡 작사했다.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고교 얄개>는 1970년대 하이틴 영화 붐을 일으켰던 석래명(石來明) 감독이 1976년에 이승현 · 강주희를 주연으로 개봉하여,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26만명의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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