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재의 문학산책] 시주(詩酒)에 취해 요절한 감성 시인 박인환
[박상재의 문학산책] 시주(詩酒)에 취해 요절한 감성 시인 박인환
  • 박상재(한국아동문학인협회 이사장) kmaeil86@naver.com
  • 승인 2023.10.04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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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세월이 가면」 일부

   박인환(朴寅煥)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면사무소 직원이었던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제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서울 종로구 원서동 언덕배기로 이사한 뒤 덕수공립소학교(서울덕수초등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경기공립중학교에 진학하였는데, 재학 중에 교칙을 어기며 영화관을 출입한 것이 문제가 되어 중퇴하였다. 이후 한성학교 야간부를 다니다가,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친의 강요로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 광복으로 졸업하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한 채 서울로 내려와 종로에서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절친이자 선배 시인 오장환의 낙원동 남만서점을 해방 후에 물려받은 것이다. 

  그의 대표작은 박인희의 낭송으로 유명해진 <목마와 숙녀>와 노래로 만들어진 <세월이 가면>이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의 마지막 시로 알려져 있다. 명동의 대포집 '경상도집'에 문인들이 모였다. 이곳에서 박인환은 극작가인 이진섭, 소설가 송지영, 백치 아다다를 불러 유명한 나애심과 같이 술잔을 기울이다 종이에 쓴 시를 내밀었다. 이진섭이 곡을 붙이고 나애심이 즉석에서 불렀다. 송지영과 나애심이 먼저 술자리를 뜨고 명동 백작으로 불린 소설가 이봉구와 함께 온 테너 임만섭이 그 악보를 받아들고서 다시 노래를 부르자, 주위에 있던 모든 손님들이 몰려와 노래를 감상했다.

  박인환은 마리서사의 단골인 <국제신보> 주필 송지영의 도움으로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선보이고, 이듬해에는 <신천지>에 시 「남풍」을 발표해 ‘신세대 시인’으로 문단에 이름을 알린다. 1948년 4월 박인환은 덕수궁 석조전에서 마리서사에서 만난 한 살 연하 이정숙(진명여고 농구선수 출신)과 결혼식을 올린다. 박인환은 키가 180cm 정도 되었고, 이정숙은 170cm였다. 이정숙의 집안이 이왕가계여서 궁궐에서의 결혼식이 가능했다. 그의 결혼식에는 소설가 박영준, 송지영, 이봉구, 시인 김경린, 양병식, 극작가 이진섭, 최재덕 등 당대의 많은 문인들이 참석했다.

  6·25 때 피난하지 못해 지하 생활을 하며 고생한 박인환은 9·28 수복 뒤 경향신문사에 들어가 종군기자로 활동하던 중 1951년 1·4후퇴 때에는 피난을 서두른다. 그는 피난지에서 경향신문의 종군기자로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후반기’ 동인을 결성한다. 1952년 <주간국제>의 ‘후반기 문예 특집’에 발표한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 같은 도전적인 글을 발표하며 기성 문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1952년 박인환은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처삼촌의 주선으로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한다. 대한해운공사에 다니는 동안 그는 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떠한 날까지」 등을 쓴다. 환도령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1955년 봄,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 자격으로 미국과 태평양 연안을 여행하고 돌아와 조선일보에 기행문 「19일간의 아메리카」와 연작시 「아메리카 시초(詩抄)」 등을 발표한다. 얼마 뒤 대한해운공사에서 퇴직한 후, 한동안 시에만 몰두한다. 마침내 그 해 10월 그의 첫 단독 시집인 『박인환 선시집』이 나온다. 첫머리에 ‘아내 정숙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들어 있고, 총 4부 56편으로 구성된 이 시집에는 박인환의 대표작이 거의 다 실려있다.

  인생을 통속적인 대중 잡지의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노래한 박인환은 시인 이상(李箱)을 좋아했다. 술은 조니 워커 위스키와 담배는 카멜을 선호했다. 이상의 기일인 1956년 3월 17일 오후부터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이상의 문학을 기리며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셔댄다(이상이 실제로 죽은 날짜는 1937년 4월 17일 새벽이다). 이렇게 사흘간의 폭음 탓에 결국 그해 3월 20일 밤 9시에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교보빌딩 부근) 자택에서 급성 알콜중독성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그는 아내와 어린 자녀들(세형, 세화, 세곤)을 못잊어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 박인환의 장례식에 온 동료 문인들은 그의 관에 조니 워커 위스키와 카멜 담배를 넣어주었다. 그가 태어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상동리에는 2012년에 개관한 박인환문학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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