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서서히 드러나는 약육강식
[덕암칼럼] 서서히 드러나는 약육강식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4.05.2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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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동물의 세계를 보면 약자가 강자의 먹이가 되는 것이 순리다. 강자는 힘찬 날개를 가졌거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녔으며 때로는 송곳보다 더 무서운 부리로 먹이를 쪼아 먹기도 한다. 이는 먹이사슬의 자연스러운 생태계이며 이성보다는 본능에 의한 삶의 현주소이도 하다.

여기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것은 그 어떠한 무기보다 강한 두뇌를 가졌기 때문이며 각자도생의 본능에서 분업과 전문성의 공유로 인해 보다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지금의 위치에 선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무기를 뺏고 옷을 벗기면 뱀이나 멧돼지 심지어 고양이 한 마리에도 꼼짝 못하는 무능한 동물이다. 아니 쥐 한 마리, 벌 한 마리에도 벌벌 기는 연약한 동물이다. 

그러한 인간이 지구 전체를 들었다 놨다하며 전쟁이라도 하면 깊은 심해의 어류들도 공포에 떨어야 한다. 아니 그조차 느끼기도 전에 핵무기 실험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약육강식이 2024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어난다면 독자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

무릇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앞서 강조했듯이 질서와 도덕이 있고 인간의 가치관과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이 있기 때문이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벌을 주는 기준에는 형평성이 있어야 하며 판결에는 다수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

암컷과 수컷은 각기 다른 기능을 갖고 있으며 성별 존재감이 존중받아야 하며 무조건 평등이라고 가리지 않고 평등한 것은 불평등을 일으키는 원천이 된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가장 먼저 약육강식의 논리에서 동물과 다름없다.

돈이라는 이빨과 권력이라는 발톱으로 사정없이 약자를 할퀴는가 하면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존재가 인간이 됐다. 심지어 야심한 밤에 산속을 걷다가도 가장 무서운 것이 귀신이나 산짐승이 아니라 산 사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제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지 살펴보자. 사람 사는 사회에서 사람이 적응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현실의 모든 변화는 무덤을 파는 현 세대들의 자화상이 보인다. 당장의 변화만 봐도 그러하다. 요즘 행정업무나 기타 공공기관, 심지어 행정복지센터, 일반 가게 점포를 보면 절반 이상이 키오스크를 도입했다.

휴대전화로 공공기관 행정업무를 보기 위해 플레이스토어에 가입해 앱을 설치하려면 회원 가입부터 인증까지 받아야 한다. 물론 IT 업무에 능숙한 연령대의 관련자들에게는 매우 편리하고 당연하다. 하지만 외눈박이 사회에 두 눈을 가진 자는 장애인이거나 바보 취급 받는다는 것과 같이 노령층이거나 평소 IT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난감한 일이다.

지금까지의 변화는 곁의 누군가가 도와주면 쉽게 해결될 일이지만 지금 같은 변화의 속도가 더 빠른 변화를 가져온다면 향후 20년 쯤 뒤에 지금의 현 세대가 물러날 시기에는 어떤 변화가 기다릴까. 당연히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부적응의 천지가 펼쳐질 터인데 그때를 감안한다면 지금은 적당한 조절이 필요하지 않을까.

대표적으로 요즘 70대나 80대가 플레이스토어에 들어가 필요한 앱을 승인받아 설치 할 수 있을까. 위에 나열한 두 가지 돈, 권력, 변화에 대한 적응력 이 3가지가 없다면 약자가 당연히 강자의 먹이가 될 수 있고 현실적으로 무능한 약자를 상대로 하이에나처럼 뜯어먹는 전화사기가 강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현 사회구조가 약자를 보호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뜯어 먹힌 약자만 바보가 되는 것이고 그나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10년도 못가서 합리적인 법안이 개정안으로 발표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할 것이다.

암수에 대한 구별도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망가지고 예절도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무너진 지 오래다. 이미 다시 세울 수도 없을 만큼 제대로 망가졌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어 가는 것이 자명할진대 노인이 대우받아야 할 자리에 개가 버젓이 자리 잡고 버티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세상이 되었을까.

개는 애완견, 반려견으로 그쳐야지 과도한 애정이 인륜을 무너지게 하고 있다. 사료부터 옷, 병원, 호텔, 미용실에 유치원까지 개 세상, 개판을 만들어 주겠다고 생색을 내며 표를 구걸하는 정치인들의 요란이나 그 요란에 표를 던지는 유권자가 인륜을 팽개치는 공범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

경로당은 여름날 찜질방이 되어도 에어컨 켜기가 두렵고 추운 날 난방비가 부족해서 이를 지원한다며 큰소리치는 정치인들에게 힘없는 노인들이 표를 던진다. 물론 그때 뿐이지만 그래도 던진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인데 다음 선거에서 같은 구호가 또 나오는 건 연료비가 아직 충당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대로라면 개도 투표권이 주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견주들이 떼로 몰려 견권을 주장하면 표가 필요한 정치인이 무슨 짓인들 못할까. 이미 동네마다 반려견 놀이터 예산이 당연하고 반려견을 위한 온갖 분야의 예산이 편성되는데 누가 감히 아니라 할까.

식용금지에 동물학대 관련법이 더욱 엄격해진다. 끝으로 가장 심각한 건 최근 일본에서 유행하는 늙은이들의 뒤처리다. 비경제 인구, 돌볼 가족들도 없는 무의탁 독거노인들의 생계나 간병, 장례는 누가 처리해줄 것인가. 그로인해 누군가가 비경제 인구 안락사법을 개정하면 통과될 확률이 매우 높다.

이유인즉 이를 반기는 유권자들이 많고 대소변도 못가리던 노인들 입장에서도 주변에서 너도나도 삶을 포기할 분위기가 조성되니 이 얼마나 합리적인 법안인가. 어쩌다 종족번식의 본능이나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감도 권력의 달콤한 공약에 녹아 대가 끊기는 세상이 되어가며 어쩌다 동물보다 더 참혹한 삶의 방정식에 놓이게 되었을까.

현재의 젊은이가 늙어지면 피할 수 없는 미래의 자화상이다. 무덤을 스스로파고 있다는 점에 대한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