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의 조선독립 이유서
한용운의 조선독립 이유서
  • 수원대 명예교수 ·계명고등학교 kmaeil
  • 승인 2008.09.0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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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9일은 만해 한용운의 생신일이다. 그는 1879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으니 올해(2008) 129주년 탄신을 맞는 셈이다. 그는 1946년 이후 병고를 치르면서도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운동 등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조국해방을 보지 못한채 1944년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 올해가 54주기가 되는 것이다. 그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1905년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그리고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로 가서 박은식, 신채호 같은 독립지사들을 만나고 1913년 귀국 불교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전”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8년 서울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의 창간도 그러한 활동의 일환이었다. 이듬해인 1919년에는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때 한국민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의 유교계 대표들이 군주국가 아닌 민주국가를 지향하는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를 꺼려 민족대표 서명날인에 빠지는 분위기에서 기독교, 천도교대표와 함께 유일하게 불교대표로 33인의 선두에서 만세3창을 선창하였으며 “기미독립선언서”에 공약3장을 첨가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에의 옥고를 치뤘다. 그는 출옥후 백담사에 머물면서 불경연구와 글쓰기에 몰두하여 “ 현담주혜”를 탈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심문을 묵살해 버리곤 하였다. 재판관이 그 이유를 재차 다그쳐 묻자 할말이 많으니 글로 내겠다고 하여 붓과 종이를 받아 유명한 “조선독립이유서”를 써냈다. 그는 참고서적 하나없이 조선이 독립되어야 할 이유를 조목조목 들어 검사의 말문을 막았다는 뛰어난 논설문이다. 5장7절에 걸친 긴논문이라 하겠다. 그 가운데 한줄만을 옮겨 보자. “...인류도 마찬가지여서 민족간에는 자존성이 있고 같은 종족 중에서도 각 민족의 자존성이 있어 서로 동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컨대 중국은 한 나라를 형성하였으나 민족경쟁은 실로 격렬하지 않았는가 최근의 사실만 보더라도 청나라의 멸망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치적 혁명 때문인 것 같으나 실은 한족(漢族)과 만주족의 쟁탈전에 연유한 것이다. 또한 티베트나 몽고족도 각각 자존을 꿈꾸며 기회만 있으면 궐기하려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아일랜드나 인도에 대한 영국의 동화정책, 폴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동화정책 그리고 수많은 영토에 대한 각국의 동화정책은 어느 한가지도 수포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없다..”1919년 2월8일 쓴 글이다. 그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의 일을 맡았다. 그러나 오늘날 한용운은 무엇보다 “님의 침묵”이라는 훌륭한 시집을 남긴 시인으로 칭송된다. 시집 앞장에 “군말”이라고 쓴 시를 보자.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찌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는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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