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국회와 내고장의 정치어르신네들
유신국회와 내고장의 정치어르신네들
  • 이달순 수원대 명예교수 kmaeil@
  • 승인 2008.10.16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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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17일 박정희대통령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을 단행하였다. 이보다 3개월 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뒤 남북정권담당자들은 남북통일이 곧 실현될 런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들뜬 화해무드 속에서 강력한 정권유지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남한의 경우 1971년 대통령선거와 총선거에서의 고전 그리고 10.2 항명파동으로 나타난 여당 자체 내의 의원들에 대한 통제의 한계라는 심각한 국면이 노정되었다. 박대통령의 지시를 공화당의원들이 집단적으로 외면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막강한 권위를 과시하던 박대통령의 위상이 자체내에서 동요하는 증후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분명 유신의 정치적 배경이다. 때를 맞춰 북한에서도 개헌을 단행했다. 유신정국은 오후 7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면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효력이 정지된 헌법일부의 조항은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10월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1개월 내에 국민투표에 붙여 확정시키기로 하였다. 그리고 늦어도 연말까지 헌법질서를 정상화시킨다고 하였다. 유신체제하에서 국회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그 가운데 2/3는 1구 2석의 중선거구에서 선출하고 1/3은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1/3에 달하는 유신정우회 의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자연히 여당인 공화당에의 의존은 줄어들게 되었다. 유신체제하에서 대의정치와 정당정치는 황혼을 맞이했다. 중앙정보부 경호실 보안사령부등이 통제하는 정치를 담당하였다.1973년 2월 27일 제9대국회의원이 탄생하였다. 이른바 유신국회의 탄생이다. 경기도에서 당선된 정치어르신네들을 보자 . 민주공화당 유승원(인천), 이병희(수원), 박명근(파주),차지철(광주), 서상린(안성), 오학진(부천), 김유탁,김채준(고양), 김용채(포천)의원이다. 야당인 신민당의원을 위의 순서대로 적어보자. 김은하, 김형일, 김형광, 오세웅 유치송, 이택돈, 천명기이다. 1978년 12월12일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시행되었다. 유신체제하에서 민심이 민주공화당 정권을 떠나버린 결과로 마침내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보다도 더 많은 표를 획득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신민당이 32.5%, 민주공화당이 31.7%를 얻었다. 그러나 경기도는 8선거구 모두 여야당 1인씩이 당선되었다. 인천 유승원(공), 김은하(신) 수원,화성 이병희(공), 유용근(신), 양주(의정부), 박명근(공), 김형광(신), 광주,여주이천 정동성(공), 유기준(신) 안성,평택 서상진(공), 유치송(신), 시흥, 부천, 윤국노(공), 이택돈(신) 고양,강화 김유탁(공) 오홍석(신) 포천, 연천 오치성(공) 천명기(신)의원이다.더 많은 표를 얻은 신민당은 김영삼을 새총재로 선출하여 유신체제에 대한 공격을 가중시켰고 이에 대해 박정희정권은 김영삼의 의원직을 박탈했다. 그 결과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의 시위 소요사태인 부마사태가 일어났고 부마사태의 진압을 위해 부산과 마산지역에 계엄령이 발동된 가운데 10월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대통령을 시해 했다. 박정희의 피살 직후 정부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12월6일 통일주체 국민회의는 유신헌법에 의해 최규하 국무총리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나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유신정권의 붕괴는 권위주의 독재의 제도화에 실패한대서 기인한다. 그러나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5천년 간 내려온 보리 고개를 없애고 민족증흥 조국근대화의 창조자로써 박정희를 새롭게 평가하는 분위기도 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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