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에서 태어난 백선행여사의 위업
수원에서 태어난 백선행여사의 위업
  • 수원대 명예교수 이달순 kmaeil
  • 승인 2008.11.02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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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 최남선의 부논에 “재산은 욕하는 자 천만인에 득하자는 일인이요 득하는 자 천만인에 선용하는 자 일인이라 하였다.” 바로 그분이 평양의 백과부라는 별명을 가졌고 우리나라 여성중 최초로 사회장의 명예를 누린 백선행(白善行) 여사이다. 백여사는 1848년 음력 11월 19일 경기도 수원에서 백지용의 장녀로 태어나 평양 중성으로 이사한뒤 7세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 김씨 슬하에서 자라났는데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행이 극진하였다.“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하고”이 글귀는 평생토록 억세고 줄기차게 생활의 신조로써 지킨 치부의 비결이요 당대의 아이들의 입에서는 이 말이 동요처럼 노래되어 흘러퍼졌고 목사의 설교나 강연중에도 많이 인용되었다. 그녀는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 태어나 교육도 받지 못한채 14세에 넉넉하지 못한 수원 안씨 재욱에게로 출가하여 16세의 묘령으로 부군을 사별하니 청상과부라기보다 아기 과부가 되었다.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간장장사 베짜기등으로 허리를 띠를 졸라메고 살아 10년뒤에는 집 한채와 현금 1천냥(20원)이 모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사후 입양을 시킨 양자는 장례를 치르기 바쁘게 상속문제를 들고 나왔다. 모녀가 아둥바둥 모은 재산을 전부 양자에게 빼앗겼다. 그녀는 씻은 듯이 슬픔을 걷어치우고 앞뒤마당에 봉선화 밭을 갈아 모종을 묶고 꽃을 따고 씨를 받아 장터에 내다 팔았다. 뜨물찌끼를 거두어 돼지를 길렀다. 한편 누에도 치고 물래도 장만하고 베틀도 사들여 실을 뽑아 타레를 감고 방직을 시작하였다. 얼굴에 분 한번 바른적 없었고 자기손으로 짜내는 명주건만 옷 한 벌 지어 입지 않았다. 백선행여사가 자기 재산을 제일 먼저 내어놓아 착수한 공익사업은 대동군 용산면 객산리에 있는 속칭 솔매다리를 부설한 일이다. 1914년 준공된 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백과부 다리”라고 불렀으나 그 지방 유지들이 그녀의 착한 덕행을 칭송하여 그녀의 이름을 백선행(白善行)이라 부르고 그 다리를 백선교라 했다. 백선행여사는 기미년 3.1운동의 감격을 안고 1924년 마침내 자기재산을 사회사업에 바칠 뜻을 표명하였다. 각 신문사에서 그를 취재하려 하니 그는 끝내 거절했다. 1927년에는 미국선교사 마포삼열이 설립한 학교도 백선행에게서 받은 부동산을 토대삼아 4천2백10원의 재단법인을 만들고 기백창덕보통학교라 하였다. 그리고 평양에 한국인 중심의 공회당과 도서관이 없기에 4만여원을 희사하여 이를 완공하니 이것이 곧 “백선행여사”기념관으로 시민들이 불렀고 3월 10일 완공되었다. 1932년에는 양주동의 한글비문이 새겨진 흉곽동상이 세워졌다. 평양수건을 쓴 흉곽동상인 것이다. 뒤를 이어 송현여학교, 광성보통학교, 숭인상업등 백여사의 도움으로 학교를 세워 그녀의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백선행여사는 1933년 신록이 퍼져 흐르는 5월8일 오후 0시4분 말년에 거처하던 전구리저택에서 “남편과 합장하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평안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88세를 일기로 자는 듯이 운명하였다. 생전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한 사회장으로 모셨으니 각계각층과 일본인 관리들까지 총출동하여 국장 못지않은 절차로 장엄한 5일장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녀의 사후에도 관리인 최경림은 조만식, 오윤선 두사람에게 1만원을 유언으로 희사하였고 양손인 안일성은 나이들고 자각이 나서 백광 “白光”이라는 문예지를 창간하였고 백여사는 오후에 수수갱이 껍질을 벗기고 손톱자국을 내어 추수기의 암산을 해왔다는 후문이다. 제주도에서 의녀 김만덕기념행사가 있듯이 백선행여사의 기념행사가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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