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현장에서-푸츠니 오페라 토스카
역사 속 현장에서-푸츠니 오페라 토스카
  • 이달순 수원대 명예교수 kmaeil@
  • 승인 2008.11.19 1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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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부터 100년전 1908년 이태리 로마의 메타스타시오 극장에서 사실주의 작품인 “토스카”에서 “그랑기뉼”의 표현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랑기뉼”이란 19세기말에 세워진 다소간 비상식적이고 무시무시한 연극만을 전문적으로 상영하던 극장을 의마한다. 토스카 제3막에서 안젤로티에 이어 세명의 주요 등장 인물들을 계속적인 죽음으로 유도함으로써 사실적인 절규와 극적인 자극을 수용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오페라 “토스카”는 “라보엠” 및 “나비부인”과 더불어 삼대 오페라중의 하나이다. “라보엠”은 가난한 예술가의 사랑과 일상생활을 시적정서로 풍부하게 묘사했고 “나비부인”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그리고 있는데 반해 “토스카”는 베리리즈모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오페라들은 모두 자코모 푸치니의 작품이다. 그의 “토스카”는 3막의 오페라이다. 빅토리엔 사르도우의 동명의 드라마를 기초로 루이지 일리카와 주세페 자코사가 이 대본을 완성하였다. 1900년 1월 14일 로마의 코스탄치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베르디 이후 이태리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는 푸치니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켈레는 작곡과 연극의 음악학교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조부 도에니코도 파이젤로 문하에서 오페라를 배운 음악가였다. 18세때 베르디의 “아이다”를 보고 큰 감흥을 받은 푸치니는 그 후 오페라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1880년 가을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했고 1883년 7월 16일에 학위를 받았다. 그의 첫 작품은 1884년 “요정빌리”였다. 1893년 그의 세 번째 작품 “마농레스코”가 성공을 거두면서 이태리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푸치니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을 위해 발표한 “서부의 아가씨” 단막 오페라 “외투”수녀 안젤리카, 카니스키키 등이 있으며 1924년 인후암으로 사망하기 전에 쓰여진 최대의 대작 “투란도트”는 사후 그의 제자 알리노에 의해 완성되었다. 푸치니 작품은 대중과 밀착되어 있는 소재선택과 서민적인 비운의 여자 주인공을 등장시켜 일반청중들의 동정을 불러 일으킨다. 음악적으로는 바그너의 악극을 받아들여 여기에 그만의 독특한 이탈리아 풍성율을 결합시켜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매력을 발산한다. 푸치니는 “좋은 대본이 없으면 나의 음악은 쓸모가 없다”라고 말할정도로 오페라 작곡에 있어서 소재선택과 대본만들기에 열정적이었다. 무대에 대한 그의 예리한 감각은 연기와 결합하여 극적인 효과를 잘 표현해 낸다. 푸치니는 어머니가 죽자 유부녀인 엘비라 제미냐니와 함께 루카를 떠났다. 서로 정역에 휩싸여 비윤리적 결합으로 야기된 엄청난 스캔들을 개의치 않을만큼 대담했던 그들은 먼저 밀라노 근처 문차에 보금자리를 꾸몄고 그 곳에서 아들 안토니오가 태어났다. 1890년 그들은 밀라노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아들 안토니오가 태어났다. 엘비라의 남편이 죽자 두사람은 결국 1904년 결혼했다. 그러나 엘비라와의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격정적인 그녀는 질투심이 많았다. 1908년 엘비라가 느닷없이 여러해 동안 푸치니의 집에서 하녀로 일해왔던 근처 마을 출신의 어린하녀 도리아 만프레리와 푸치니와의 관계를 의삼하게 되었다. 그리고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그들의 집에서 내쫓았다. 그후 하녀는 음독자살했고 시신을 부검한 결과 처녀였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은 당시 가장 유명한 스캔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사건과 함께 1908년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는 “가정”의 그랑기뉼로 표현되는 100전년의 역사속의 현장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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