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백년전 망원경을 만든 갈릴레오
4백년전 망원경을 만든 갈릴레오
  • 경인매일 kmaeil
  • 승인 2009.01.12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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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대 명예교수 ·계명고등학교장 이 달 순
현대과학의 시조로 불리는 갈릴레이는 우주의 비밀을 발견한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이다. 1609년 그가 직접만든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했으니 금년으로 4백년이 된다. 1609년 8월 25일 그는 첫 망원경을 베네치아 입헌자들에게 설명했다. 그의 망원경제작은 무역업과 관련된 일에 유용하게 쓰여졌다. 1610년 1월 7일에 그는 망원경을 이용하여 그가 당시에 주장한 세 개의 별들 모두는 목성에서 일렬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너무 작아서 거의 볼 수 없는 세 개의 고정된 별들”에 대해 관찰했다. 그리고 목성과 연관있는 이들 별들 의 위치는 만약 그 별들이 진짜로 고정된 별들이라면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변한다는 것을 다음날의 관측을 통해 알았다. 1월 10일일에 갈릴레오는 그 별들중 하나가 사라졌음을 지적했고 관측을 통해 갈릴레오는 사라진 별이 목성뒤로 숨은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며칠내로 갈릴레오는 그 별들이 목성 주위를 돌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갈릴레오는 세 개의 목성의 4대 위성을 발견했고 이는 이오 유로파 칼리스토였다. 그는 또 다시 13일에 네 번째 위성인 가니메데를 발견했다. 갈릴레오는 이 4대 위성에 그의 미래의 후원자인 투스카니공국의군주 코시모2세와 그의 세형제를 기려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나중에 천문학자들은 갈릴레오 자신을 기려 갈릴레오의 위성이라고 새로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는 처음으로 태양의 흑점을 발견하고 달 표면에서 산맥을 찾아냈으며 은하수가 엄청나게 많은 별들의 집단임을 밝혀냈다. 1610년 갈릴레이는 이러한 성과를 집대성한 소택지를 펴냈다. 그는 그책에서 N. 코페르니쿠수의 태양주심설이 명백한 사실임을 입증했다.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코페르니쿠수의 지동설은 무려 1500년동안 받아들여졌던 천동설을 부정했으므로 가톨릭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과학혁명의 주역가운데 한사람으로 천문학외에 역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에는 성이 아닌 이름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줄여서 부를때에는 “갈리레오” 라고 부른다 그는 1564년 가난한 플로렌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피사의 대학에서 먼저 의학을 공부했다. 그의 진짜관심은 수학과 자연철학에 있었다. 그는 25세때 피사대학의 수학교수로 임명되었으며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낙하물체의 공개실험을 했다. 사탑 꼭대기에서 무게가 다른 두 금속 물체를 떨어뜨렸다. 두 금속물체는 실제로 같은 순간에 땅에 떨어졌는데 이 사실은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 확인된 긔의 실험도 대학에서 이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치는 다른 교수들의 믿음을 깨지는 못했다. 그는 결국 1591년 교수직을 사임하기에 이르렸다 이듬해 그는 피두아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그곳은 과학적 연구에 보다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여기에서 거의 18년동안 갈릴레오는 실험과 강의를 계속했고 널리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633년 종교재판소에 소환되었다. 지구가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무려 15여년동안 받아들여졌던 천동설을 부정했으므로 가톨릭의 격렬한 저항을 받아왔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지지한 대가를 혹독히 치르게 된것이다. 그해 6월 22일 그는 마침내 재판에서 지동설이 오류임을 자인했다. 그의 책은 2백년 동안이나 금서목록에 올랐고 종교재판소의 감시아래 1642년 1월에 자신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망원경은 천채를 관측했고 4백년 뒤 오늘은 인공위성에서 망원경으로 지구를 관찰하기 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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