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 2년,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참 으로 많은 것을 앗아갔다. 한국연예예술인협회의 자문을 맡아 직·간접적으로 예술인들의 내면을 살펴보면서 참으로 혹독한 시련의 날들이었음을 증언할 수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당연한 것이고 관객이 없는 무대,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요란한 객석들은 침묵이 공포였다.
노래광장의 무대, 카페나 호텔·레스토랑의 연주단은 물론 품바, 마당놀이부터 대형 가수들의 커다란 무대까지 전멸이었다.
흥이 죽었고 신명도 함께 줄었다. 한번 꺼진 불꽃은 쉽사리 살아나지 못했지만, 우리민족의 특성상 음주가무는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는 쉼터가 아니었던가.
어쩌다 일부에 국한되겠지만 일명 제비(?)의 출현으로 인한 퇴폐풍조 또한 필요악이고 사람사는 사회의 단면이 아니었던가.
요한복음 8장 7절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적혀있다. 춤을 빙자한 스킨십은 삼류 댄스 문화의 단면이었지만 누구든 건전한 스포츠 댄스나 야외 에어로빅을 즐기면서 이제 춤은 남녀노소를 떠나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분야별·규모별 모든 문화·예술·체육 전반에 찬 바람이 불었다.
오늘은 정부가 정한 기념일은 아니지만‘세계 춤의 날’이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음주가무는 삶의 흥이자 신바람이었고 한바탕 온몸을 흔들고 나면 신체적·정신적 건강은 한단계 향상되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필자도 고교시절 트위스트와 고고 춤을 추며 롤러스케이트를 탄 추억이 새롭다. 사람이 일만 하고 여유가 없다면 얼마나 삭막하고 무거운 침묵속에 살아야 할까.
하지만 과거나 현재나 농민은 농악이, 잔치에는 풍악이 있었으며 만선의 기쁨을 안고 항구로 돌아오는 어부에게는 풍어제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잠시도 편안할 수 없이 숱한 외세의 침략 속에 정작 우리민족에게는 신명나는 놀이문화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어쩌다 서양에서 검증없이 받아들인 음주가무 문화가 방송매체의 매스컴을 타고 국민들 생활속에 파고들며 참된 여흥은 바탕을 잃어버렸다.
심지어 특정 무희들이 무대를 누빌 때 일반 국민들은 나이트클럽 조명 아래 출처도 불분명한 몸짓으로 마구 흔들어 대는 게 전부였다.
전세계 어디를 가도 찾아볼 수 없는 관광버스의 좁은 복도조차 요란한 음악속에 춤추는 문화가 있었으니 기이한 특징임에는 틀림없다.
간혹 영화에서 마사이족의 춤이나 장작불을 가운데 두고 형형색색의 분장을 한 인디언족의 춤을 보면 해당 부족의 문화나 삶의 특징까지 느낄 수 있다.
이쯤하고 일반 국민들이 흥겨운 음악과 춤을 출수 있는 문화를 만들면 어떨까 구상해 본다. 과거 유교문화가 자리잡은 탓인지 춤을 점잖음의 반대 명사로 자칫 오두방정이나 경박스럽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레깅스를 입은 여성들이 대형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몸매를 한껏 뽐내며 추는 춤은 이제 그리 낯설지 않다.
춤을 추려면 먼저 시간적 여유와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가장 간단한 사교춤부터 축제나 무대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누구든 댄스 예절을 갖춰가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매너까지 더한다면 춤만큼 공감대 형성이 빠르고 친근감을 더하는 비즈니스가 없다.
특히 건강을 위한 각종 스포츠댄스는 누구 눈치 볼 게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기능을 활성화시키고 정신적 자신감을 높이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
필자의 논리대로라면 오천만 국민 대다수가 그래야 하는데 실제 사교댄스나 건강에어로빅, 스포츠댄스를 즐기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필자가 지난 2021년 9월부터 준비한 생활체육의 단면을 소개하기로 한다. 약 40개 종목에 17개 시·도 협회장까지 임명된 대한생활체육회는 코로나19로 인해 꼼짝달싹 못하는 시국이 언젠가는 종식되리라 보고 국민들에게 활기를 되찾는 발판이다.
생활체육이란 사실 국제 스포츠나 올림픽 정식 종목이 아닌 동네축구부터 일반인들이 생활속에서 쉽게 접목될 수 있는 종목들이 많다.
사람은 누구든 각자의 본능적 소질이 있다. DNA 구조가 다른 만큼 생업의 종사하는 분야와 신체적 특징은 별개이기에 스님도 축구를 잘할 수 있고 목사도 수영을 잘할 수 있으며 은행원도 배구를 잘할 수 있다.
국민 모두가 각자의 직분을 다하며 일할 때 일하고 놀때 신명나게 춤출 수 있는 행복한 나라. 그게 그리 어려울까.
이제 세상은 그런대로 먹고 살만한 시대가 됐다. 조금만 여유를 갖고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찾아 온다면 어울림 마당이 될 것이다.
국회의원도 시장 상인에게 선거때만 손을 잡고 미소 지으며 표를 구걸할 게 아니라 명절날 멍석위에 함께 앉아 막걸리도 마시고 술이 취하면 어깨춤도 출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어떤 것이든 소통이 중요하다. 말도 좋지만 한 잔의 술이면 더 좋고 좁은 공감에 국한될 게 아니라 한바탕 함께 춤추며 온몸으로 대화할 수 있는 여유라면 축제는 더욱 빛날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너무나 경직되어 있다. 오직 먹고 살기 위해 한치의 양보나 이해보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짙다 보니 삶 자체가 삭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추석이나 정월 대보름날 밤 노래와 무용이 혼합된 강강술래가 있었다. 춤은 아이들의 귀여운 몸짓에서 시작되어 청소년 시절 열정적인 랩·댄스와 중년이 되어 사교댄스를 출 때까지 장르도 다양했다.
함께 춤추며 노래하는 장면은 주유소 광고에서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이제 서로 화합하고 위해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때 생활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
어찌하든 코로나19가 물러가고 있는 분위기다. 다시 활기찬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식어버린 흥과 굳어버린 몸부터 풀어야 하지 않을까. 문을 활짝 열고 가까운 헬스장이나 공원에라도 나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