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과 소천과 호박꽃 초롱
백석과 소천과 호박꽃 초롱
  • 박상재(한국아동문학인협회 이사장) kmaeil86@naver.com
  • 승인 2023.07.26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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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재(한국아동문학인협회 이사장)

 

기록적인 장마와 폭우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장마에 호박 크듯 한다’더니, 무성히 우거진 호박 넝쿨 사이로 노란 호박꽃들이 한창이다.

‘호박꽃도 꽃이냐?’라는 비아냥거림도 있지만 호박꽃 만큼 튼실하고 환한 꽃도 드물다. 꿀도 듬뿍 품고 있어서 벌들도 많이 불러 모은다.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오래 보고, 자세히 보면 호박꽃도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호박만큼 무탈하게 잘 자라고, 우리에게 이로움을 많이 주는 식물도 없다. 커다랗고 환하게 피는 노란 호박꽃을 보면 마음이 환해지고 편안해진다. 

호박꽃을 따서는/무얼 만드나./무얼 만드나.//
우리 애기 조그만/초롱 만들지./초롱 만들지.//
반딧불을 잡아선/무엇에 쓰나./무엇에 쓰나.//
우리 애기 초롱에/촛불 켜 주지./촛불 켜 주지.

아동문학가 강소천(姜小泉, 1915~1964 )이 쓴 「호박꽃 초롱」이란 동시의 전문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무들과 호박꽃을 따서 초롱을 만들어 놀던 추억이 있다. 커다란 호박벌이 꽃속에 들어가면 벌을 사로잡으려는 호기심에 꽃을 움켜쥔 채 따서 잉잉거리는 벌 소리를 듣기도 했다.
『호박꽃 초롱』은 1941년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발행한 동시집으로, 서두에 백석(白石) 시인이 쓴 「서시(序詩)」가 실려 있다. 이 동시집은 강소천이 1930년 문단에 등단한 이래 10여 년간 발표한 작품들을 모은 것인데, 일제강점 말기의 극악한 조선어말살정책 밑에서 우리글로 된 창작 동시집을 내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돋보이는 책이다.
이 책은 모두 114쪽으로 작품을 5부로 나누어 <호박꽃 초롱>에 9편, <모래알>에 12편, <조그만 하늘>에 12편, <돌멩이>에 2편으로 모두 35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닭」 · 「보슬비의 속삭임」 · 「호박꽃 초롱」 · 「따리아」 · 「언덕길」 · 「조그만 하늘」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한울은/ 울파주(울바자)가에 우는 병아리를 사랑한다./ 
우물돌 아래 우는 돌우래(땅강아지)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버드나무 밑 당나귀 소리를 임내(흉내)내는 詩人을 사랑한다.//
한울은/풀 그늘 밑에 삿갓 쓰고 사는 버슷(버섯)을 사랑한다./ 
모래 속에 문 잠그고 사는 조개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두틈한 초가지붕 밑에 호박꽃 초롱 혀고(켜고) 사는 詩人을 사랑한다.// 
한울은/공중에 떠도는 흰구름을 사랑한다./ 
골짜구니로 숨어 흐르는 개울물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아늑하고 고요한 시골 거리에서 쟁글쟁글 햇볕만 바래는 詩人을 사랑한다.// 
한울은/이러한 詩人이 우리들 속에 있는 것을 더욱 사랑하는데/ 
이러한 詩人이 누구인 것을 세상은 몰라도 좋으나/ 
그러나/그 이름이 강소천(姜小泉)인 것을 송아지와 꿀벌은 알을 것이다.// 

 

백석(白石, 1912~1996) 시인이 쓴 이 책의 서시(序詩)이다. 백석은 평안도 정주가 고향이라 해방 후에도 북한에서 살았다. 그는 조선일보에 근무하던 1936년 1월에 『사슴』이라는 100권 한정판 시집을 출간했다. 민족 시인으로 후세에 사랑받는 윤동주는 이 책을 연희전문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필사하며 외웠다. 훗날 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나오는 「별헤는 밤」 에는 백석의 『사슴』에 나오는 「흰 바람벽이 있어」에 나오는 프랑시스잼과 라이너마리아 릴케가 같이 등장한다. 

우리나라 시인들에게 최고의 시인으로 사랑받는 시인이 백석이다. 그는 북한에서 정치적 · 이념적인 이유로 시작 활동이 원만하지 못하자, 「개구리네 한솥밥」, 「지게게네 네형제」, 「귀머거리 너구리」 등의 동화시를 썼다.

강소천은 함경도 고원이 고향으로 함흥에 있는 영생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백석은 그 무렵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있었다. 그 때 소천은 백석을 만나 문학 지도를 받았다. 백석이 아끼고 좋아하는 제자 소천이 첫시집을 출판한다 하니 백석이 기뻐하며 서문에 해당하는 서시를 써준 것이다. 백석의 서시를 보면 그가 소천을 얼마나 아끼고 좋아했는지 잉잉거리는 당나귀와 호박벌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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