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출신을 흔히 ‘흙수저’라 한다. 반대로 날 때부터 부모 잘 만나 먹고사는데 지장 없이 온갖 호사를 누리는 사람은 입에 금수저를 물고 났다 해서 ‘금수저’라 한다. 독자들은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났을까.
평균적으로 수도권에 사는 중산층이라면 전국 지방에서 상경한 흙수저들이 온갖 고생 끝에 자수성가해 밥은 먹고 사는 사람들을 말하지만 일부 성공한 사업가나 공직자들을 보면 나름 산전수전 겪어야 도달할 수 있는 꼭짓점이다.
오늘은 흙에 대한 비하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함께 공감대를 형성해보기로 한다. 일단 흙은 지구를 구성하는 가장 큰 토양이고 그 위에 바닷물과 강과 호수가 있어 이를 5대양 6대주라 한다.
그리고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지만 아니다. 그건 철학적 의미에서 그렇고 매장문화가 성행할 때 그런 것이지 실제로 사람은 사람에게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화장후 바다나 강에 뿌려지기도 하기에 흙과는 거리가 다소 멀어지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태어나서 사망할 때까지 흙에서 자라는 온갖 식물을 섭취하며 살게 된다는 점이다. 육식으로 섭취하는 동물 또한 먹이사슬의 가장 밑 단계를 찾아보면 흙으로부터 시작되니 인간이 살아가는데 흙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지키고 보존해야 할 신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흙에 대해 어떤 해를 끼치고 있으며 어떤 보존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 첫째가 농사로 거둘 수 있는 식물인데 뿌리식물, 줄기식물, 열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온갖 먹거리를 제조, 유통해 가며 살고 있다.
곡식과 과일, 심지어 특용작물과 목재 등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모든 수확에 대해 당연한 듯 가꾸고 거두며 생존을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온갖 농약은 물론 돈이 될만한 소재라면 마구 파헤치고 자동차의 운행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터널과 교량도 설치한다.
면적 대비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토양오염에 대한 염려는 진작 내려놓은 상태다. 해양처럼 오염도를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국제환경단체인 그린피스라도 활동 중이지만 말이 없는 흙이다 보니 발전 위주의 파괴만 있을 뿐 누구 하나 어느 단체하나 흙에 대한 원상복구의 책임이나 관심은 전무한 실정이다.
흙에 대한 기능과 역할은 광범위하면서도 위대하다 싶을 정도지만 이에 대한 보존방법은 기초적인 대안마련도 없다. 토양은 한번 오염되면 다 파헤쳐 세척하지 않는 한 그냥 스스로 정제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가 쓰레기매립장과 기타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곳에서는 토양오염이라는 단어가 필수적이다. 현재까지 흙을 지키는 것은 지렁이뿐이다. 지렁이가 살아있어 흙에 생명을 불어넣는 생존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전부다.
인간이 과용해 작물을 얻는 과정에서 지나친 농약살포와 화학비료로 흙의 주성분이 산성화 되면 당장은 몰라도 후손들은 어떻게 먹고살란 말인가. 최근 팜 농업이 유행이다.
농작물 빌딩과 마찬가지인데 작물은 하늘의 햇빛, 바람과 비, 비옥한 농토의 자연적인 영양분, 그리고 인간의 노력이 병행되어야 자랄 수 있는 것이지 하루 하나씩 낳아야 할 계란을 양계장 조명을 껐다 켰다 하면서 비정상적인 계란을 만들 듯 억지로 만들어 먹을 일이 아니다.
흙이 농사짓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일까 아니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아스팔트나 시멘트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동네 골목도 흙이었고 일명 신작로라 하는 도로도 흙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적 동심에 젖어 뛰어다니던 운동장도 흙이었지만 인조잔디로 바뀌었고 인도는 보도블록으로, 자전거조차 자전거 전용도로라며 붉은 투스콘으로 포장되어 흙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이제 손에 흙 묻히는 일은 더럽고 천한 일이 되었고 기껏해야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물질로 전락했다. 50~60대 정도는 되어야 흙을 만져보고 흙속에서 성장했지 20대 미만의 성장세대는 흙에 대한 관심이나 친근감이 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은 2015년 3월 27일 농림 축산식품부가 흙의 중요성을 환기하기 위한 정한 ‘흙의 날’로 매년 3월 11일 이다. 3월 11일을 흙의 날로 제정한 것은 숫자 3이 천(天)·지(地)·인(人) 3원과 농업·농촌·농민의 3농을 의미하고, ‘흙 토(土)’를 풀면 십(十)과 일(一)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맨발 걷기가 인기를 끌면서 황톳길 조성이 전국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조성되고 있다. 변화에 대한 거부라기보다 적어도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흙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 흙에 대한 소중함을 공감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은 어떨까.
부모들은 먹고 살기 바쁘고 자녀들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을 줄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갯벌도 흙이니 머드 팩 축제라도 참여해 보고 공깃돌 5개로 기성세대들이 하던 놀이도 함께 해보며 우리민족 고유의 놀이문화가 얼마나 재치와 지혜가 담긴 줄도 알려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해변에 가면 모래성도 쌓아 파도에 부서지는 추억도 만들어 보고 고운 가루로 반죽된 흙으로 간단한 도자기도 만들어 보면 얼마든지 흙에 대한 촉감을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된다. 그마저도 어렵다면 베란다 화분 가꾸기에 대한 체험과 주말농장이라도 함께 다녀보는 것이 어떨까.
물론 처음에는 쉽지 않겠지만 사람과 자연의 공존에 대한 경험이라면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가 있다. 아무 덕도 없이 인간에게 주기만 하는 흙에 대한 보존은 흙을 위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해서라도 오염을 줄이는 게 맞는 것이다.
누구의 책임일까. 농약을 쳐야 벌레가 안 먹고 보기에 좋은 과일이나 채소를 구입하기 때문인데 벌레도 못 먹는 작물을 사람이 먹고 있다. 오죽하면 친환경, 무공해, 무농약이 홍보문구로 사용될까.
결국 현대 성인병의 원인이 되는 것이고 작물을 눈으로 먹는 것도 아닐진대 자업자득의 눈먼 안목이 우리 스스로를 망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