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성칼럼] 당시대 詩雄 卞榮魯, 吳相淳 娼女
[김운성칼럼] 당시대 詩雄 卞榮魯, 吳相淳 娼女
  • 경인매일 webmaster@kmail.com
  • 승인 2006.12.2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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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평론신문 발행인

자유당 시절 중엽 때(54-57년) 서울명동(明洞)거리에서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사장 수주 변영로 선생과 시인 공초 오상순 선생이 마주쳤지만 악수는커녕 이웃집 개보듯 서로 스쳐 지나갔다.

두 분은 30년 동안 시우(詩友), 술친구로 같은 년대의 문학동인(文學同人)이었지만 이 광경을 보고 동행인이 의아해 했다.

수주는 영문학자요 한문시(漢文詩)의 경지를 그 연대에 누구도 따라가지 못한 시웅(詩雄)이란 평이 나돌았고 공초는 일제중엽 때 발행한 폐허지(廢墟誌)에 주옥같은 현대시를 연재(連載)하여 후학인 문하생이 줄줄이 따를 정도였다.두 사람의 돈독한 교우에 혹시나 금이 갔나 싶어서 동행한 자가 물었겠다.

“30년간 절친한 문학 동인이라 들었는데 뜬소문 이오이까?”하고 주점에서 마주한 수주선생이 털어 놓기를 그로부터 20년 전 장년시절 두 사람은 중국 땅에 외유(外遊)할 일이 있어서 건너갔다가 일을 마치고, 인천행 배를 타러 청도항에서 여장(旅裝)을 풀었겠다.배편을 기다리느라 무료한 날 두 분은 청도항은 외국배가 많이 내왕하는 곳이니 외국 선원을 맞는 창녀(娼女)를 구경키로 했단다.

창루(娼樓)에 들른 두 분은 제각기 눈요기 되는 중국 여자를 골라잡고 하룻밤을 즐겼다는 것.

일을 치룬 수주 선생이 아침에 공초 선생 방을 노크했던바 잠에서 덜 깬 접대녀가 꼭두새벽 탈출했다는 것이었다.

괘씸쩍다 여긴 수주는 여사(旅舍)에 돌아와 “같이 창루에 간 것은 고국 땅에서는 소문날까 이루지 못한 여탐을 어찌 혼자 왔느냐고....”이 때 공초 선생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길“내가 불자인데 어찌 부처님의 자비를 어기고 젊은 색시를 짓밟겠는가” 하고 딱 잡아떼지 않겠는가.

꼼꼼한 심성의 수주 선생은 그 날 대낮에 크게 작심하고 어젯밤 잠잔 창루(娼樓)를 찾아 들어 신진으로 공초 품에 안겼던 낭자(娘子)를 찾아내어 꼬득여서 술대접을 하면서 수주가 영 손짓발짓으로 수작을 붙자 외국 선원을 접신하느라 영어를 아는 그 낭자는 “just three times"를 연발하면서 세 손가락을 내밀어 ‘꼭 세 번’을 표시하지 않는가.수주는 낭자의 이 말에 왈칵 분노가 치밀었겠다.저도 그 짓을 범했으면서 천연덕스럽게 부처님을 팔아 조신을 내세웠다는 양면성이 미워서 였는 것이다.

수주는 이렇게 20년 전의 이국(異國)땅 중국에서 벌린 일을 세월이 지났으니 옛 추억으로 털어 놓는다고 하면서 죽자사자하는 문학동인의 그 때의 일이 불현듯 되살아나서 건성으로 지나쳤다고 실토하지 않겠는가.

이 말을 듣고 난 동행한 문하생이 “선생님 철학가 소크라테스도 금주금욕을 주장하면서 이슥한 밤 주방에서 미희(美姬)를 데리고 손은 만지작거리면서 홀짝홀짝 독주를 음미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하였거니 수주 무릎을 ‘탁’ 치면서 “하기사 그렇지 공자 맹자로 그 짓이 있었기에 후손에 맹(孟)가 공(孔)가 성이 있는 것일게고 공초가 자신은 깨끗하다 하였으나 세 번을 치뤘다는 중국낭자의 말이니 절간의 중놈들 공불 오는 아낙들을 겁탈한다는 말 역시 헛소문은 아닐 것이다.

사내놈들 그렇고 그렇지. 내일 당장 공초를 불러 너도나도 깨끗한 도덕군자(道德君子)하는 것은 우선으로 치부하여 화해술로 달래자고...”두 분은 타계한지 40년 세월이 지났다(수주 61년, 공초 64년)당대의 내노라 한 두 문호(文豪)시여 천상(天上)에서는 세월 따라 오해(誤解)가 풀리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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