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문화재 반환 유네스코에 상정
불법문화재 반환 유네스코에 상정
  • 경인매일 kmaeil@
  • 승인 2007.06.06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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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과학 역사문화 유산위원회 즉 유네스코 산하 기구로 도난 또는 약탈 문화재를 원래 소유 국가로 반환하는 활동을돕기위해 만들어진 유엔기구가 ‘불법 문화재 반환촉진위원회’다.
터키와 독일간의 독일 고고학자가 20세기 초 터기영토에서 발굴해간 고대 히티이트의 유물인 보라즈콰이 석상의 반환문제 등이 상정된 바 있다. 이번에 한국 정부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 외규장각 도서 반환문제를 유네스코에 상정키로 결정했다.
2008년 유네스코 산하 ‘불법문화재 반환촉진 위원회 30주년 특별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겠다는 의사를 지난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전달했다. 한국에서 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가 약탈해간 한국의 문화재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릴 방침이다.
이러한 결정은 외교통산부와 문화관광부가 각각의 의견을 청와대에 보고한 뒤 내려진 것으로서 1866년 병인양요때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서 약탈해간 왕실의궤(행사도)등 희귀도서 279권이 외규장각(강화도에 있던)도서다. 프랑스는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 이 문화재 반환 조건으로 초고속 열차(TGV)를 한국에 팔았지만 한국고속철도(KTX)가 개통된지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어 당시의 약속이 TGV판매를 위한 공약(空約)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한국 실사단의 보고에 다르면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외규장각문서는 물에 젖어 훼손된 부분이 적지 않았고 일부는 중국문서로 분류돼 있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한 며칠전 우리정부는 미국정부에 1871년 ‘신미양요’때 미군이 강화도에 침입하여 뱃어간 강화수비대장 이재언 장군 장수기를 돌려주도록 요청하는 장수기 반환청구를 제출하였다 한다.
서양인들은 침범지역 장수기를 뺏어간 것이 전쟁 승리 기념품으로 영원히 영광으로 생각하고 보관한다고 한다.
당시 조선왕조 정국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서 파락호 왕족인 흥선대원군이 철종왕이 후손없이 서거하자 자신의 둘째 아들 고종을 12세 어린나이로 왕위에 나가게 하고 왕권을 확립하고 거세게 몰려오는 외세(外勢)가 통상 거래와 천주교포교였다. 서양과 일본의 동점서진정책에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박해령과 쇄국정치를 펴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동안 8천여명의 천주교 신자(信者)들을 학살하였다. 이것이 역사상 ‘병인박해’ 혹은 ‘병인사옥’이라 부르는 우리 역사의 오점이다. 천주교 신자에 대한 이같은 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1866년 10월 군함 7척에 병력 1천명을 승선시키고 강화도를 기습점령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강화도에 수복계획을 구상하고 그들을 공격했지만 화력에 밀려 실패했으나 다시 제주 목사 양헌수의 전략으로 함경도, 강원도에서 호랑이 사냥 포수들을 동원 강화정족산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장교 중 동양사에 관심이 있는자가 강화외규장곽에 보관중인 조선왕조 왕실의궤 등 귀중문화재 문서를 탈취하여 갔고 93년 고속전철 설치 교섭시 프랑스 정부와 교섭하여 탈취해간 문서반환이 약속되었으니 일부만 돌려받았고 나머지는 그대로 프랑스에 있는 상태다. ‘신미양요’ 2개월 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간 미국상선 ‘제너널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포수군민들이 화공(火功)을 받고 불타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5년 뒤인 1871년 ‘신미양요’로 발전하게된다. 미국은 두 번에 걸친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셔민호’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동시에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두번이나 조선원정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1871년 5월 조선원정을 결행하고 군함 5척, 병력 1천 2백여명 함포 85문으로 무장하고 강화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그들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한다. 이것이 이른바 ‘손돌목 포격사건’으로 조선과 미국간의 최초의 충돌이다.
이 사건이후 미국은 보복 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면서 평화협상을 제의해왔다. 조선측의 거부로 평화협상이 결렬되자 그들은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강화도 초지진에 무혈입성하였다.
이후 조선 수비병은 광성보에서 전투를 벌렸지만 패하고 강화도는 완전히 미국(美軍)의 손아귀에 넘어가자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이 밀려 결국 점거 1달여만에 강화도에서 조선·일본 수호협약이 체결되고 미국은 제물포항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이때 구주제국의 동진 식민정책과 일제의 대륙 진출 식민 획책이 조선국 한반도에서 마찰이 일어나 청일(1894년 7월) 노일(1904년)전쟁이 일어나고 일제의 승리로 조선식민 통치 이권이 구주제국과 미국의 양해하에 이루어졌다. 조선조정에서는 대원군파 며느리 민씨와 의구파 개화파의 자중지란을 악랄하게 이용한 일제 식민 통치는 1910년~1945년 36년간 치욕적인 암울한 세상을 우리 민족은 겪어야만 했다.
나라와 나라간의 국익 다툼에 영원한 적도 없고 우방도 없다. 나라를 지키고 민족의 자존심을 찾고 역사를 바로 세우자면 호합단결로 국론을 통일하고 치열한 경제 경쟁에서 시장경제 성장일로 매진하여 부국강병으로 부강(富强)한 나라를 세우는 길이다. 역사가 증명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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