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현장에서 - 3.4대총선의 내고장 국회의원
역사 속 현장에서 - 3.4대총선의 내고장 국회의원
  • 이달순수원대 명예교수 kmaeil@
  • 승인 2008.04.14 2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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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의 전쟁이 끝난 잿더미 속에서 재난에 몸부림치고 있던 1954년 5월20일 제3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양대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당과 민주국민당이 처음으로 공천제도를 실시하여 정당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것인데 경기도에서는 모두 104명의 후보자가 나와 23명이 당선 평균 4.3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자유당 입후보자는 공천을 해주기 앞서 이대통령이 제안한 3선 개헌안을 지지할 것을 서약했으며 공천후보는 야당의 후보자가 다수 난립함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범석, 김성수, 조봉암등 저명 정객들은 소위 입후보등록을 거부당하는 한편 자유당은 야당의 유망 후보자인 민주당의 신익희를 제지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신익희는 우리 경기도에서 당선되었다. 그리고 경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무소속으로 당선된 내 고장의 야당 정치인은 인천의 곽상훈, 양주의 강승구, 양평의 천석기, 여주의 김의준, 김포의 정준, 안성의 오재영이었다. 자유당으로 당선된 의원은 인천의 김재곤과 표양문, 수원의 정존수, 고양의 한동석, 양주의 김종규, 포천의 윤성순, 가평의 오형근, 이천의 김병철, 용인의 신의식, 평택의 황경수 등이었다. 11월27일 3선 개헌안이 1표차로 부결되었는데 이튿날 대통령으로부터 명을 받은 공보처장 갈홍기는 개표결과 발표시 착오가 발생했다고 선언하고 유명한 4사5입론을 내세웠으며 11월29일 정정선포를 앞두고 의사당에서는 난투극이 벌어져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다. 제4대 국회의원선거는 1958년 5월2일에 실시되었다. 이 선거도 경찰의 탄압과 활동으로 자유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도 여촌야도의 현상은 두드러졌다. 당시 경기도의 이천군에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여촌야도의 투표성향 때문에, 이승만-이기붕체제를 굳히기 위한 서울 서대문 을구를 선거구로 가진 이기붕의장의 당선이 어렵다는 여론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정재가 일찍부터 터를 닦아놓은 경기도 이천을 안전한 선거구로 택하였다. 4대 선거에서의 당선자는 자유당이 14명 민주당이 8명 무속이 3명이었는바 여,야의 비율로 보아 경기도는 야당성향이 두드러지게 높아진 것이라 하겠다. 경기도 출신의 자유당 의원들은 1955년 11월 18일 국가보안법을 비롯하여 지방자치법 개정안 신년도 예산안 및 12개 세법 개정안 등 야당의 저지로 통과시킬 수 없었던 27개 의안을 불과 몇 시간 내에 일사천리로 무더기 처리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내세웠다. 당시 민주당으로 당선된 경기도 국회의원은 인천의 김재곤, 곽상훈 김훈, 수원의 홍길선, 양주의 강영훈, 가평의 홍익표, 용인의 구철회, 화성의 홍봉진이었고 야당성향 무소속으로서는 김포의 정준, 강화의 윤재근이었다. 경기도의 야당 의원들은 자유당의 권력의존적인 의원들과는 달리 민주정치수호를 위한 투사의 면모를 뚜렷하게 보여준 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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