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현장에서 - 모차르트와 “피가로의 결혼”
역사 속 현장에서 - 모차르트와 “피가로의 결혼”
  • 이달순 수원대명예교수 kmaeil@
  • 승인 2008.05.27 2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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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마르세가 희곡 “시빌랴의 이발사”를 완성한 것은 1778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30년 전인 것이다. 보마르세는 18세기 계몽사상의토대를 만든 권력분립론자인 몽테스퀴와 볼테르의 이념적 승계자라고 할 수 있다. 1641년 영국의 청교도혁명이 일어나고 1689년 명예혁명으로 영국의 의원내각제 민주정부가 탄생하고 1776년 미국의 독립전쟁이 승리하여 민주국가로 독립정부를 수립하게 되고 1789년 불란서의 부르조아혁명이 발발하는 계기에 보마르세는 당시 귀족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강력히 비판하며 구 지배체제의 몰락을 암시하는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보마르세는 이어서 1784년 “피가로의 결혼” 그리고 1796년 “죄 있는 어머니”등의 일련의 3부작 가운데에 재치와 반항심이 넘치는 하인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희곡을 완성한 것이다. 여기에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뛰어들었다. 그는 빈의 궁전에서 이탈리아의 대본작가 다폰테를 만나는데 두 사람은 한 눈에 서로 천재성을 알아본다. 둘은 7년의 나이차이가 있지만 그 후 오페라의 명콤비로서 예술적 동반자의 관계를 유지한다. 다폰테는 불란서혁명을 이끌어낸 민약론의 저자이며 인민주권설의 민주주의 사상가인 J.J룻소와 볼테르의 열열한 신봉자였으며 불란서 부르봉왕조의 구질서를 붕괴시키고자 활동하고 있는 혁명가적 지식인이었으며 또한 자유연애를 구가하던 비판정신의 당대 풍운아였다. 모차르트에게는 다폰테가 마치 정신적인 맏형과 같은 존재였으리라. 이때에 모차르트는 하이든으로부터 프리메슨에의 가입을 강하게 권유받게 되며 그 이후로 모차르트의 혈관속에는 시대와 지배계급에 대한 강한 비판정신의 피가 수혈되게 된다. 모차르트는 1786년 “피가로의 결혼”의 작곡을 완성하게 된다.보마르세는 자전적 오페라의 시나리오 “피가로의 결혼”에서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그의 강렬한 사회비판을 절규한다. 막이 서서히 오르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주인공은 혼자 떠들어 댄다. “수잔나! 너는 나와의 백년가약의 약속을 깨고 다이아몬드에 눈이 어두워 백작에게 시집가는 너가 야속하구나!” 마치 우리의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를 보는 듯 하는 장면인 것이다. 그리고 피가로는 다시 백작을 향해 독백한다. “네가 뭐길래 나의 애인을 빼앗아 가느냐 너는 너의 아버지가 백작이라는 것 이외에 나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그렇게 외치고 다시 천장을 보며 자책하는 목소리로 읊는다. “나는 분해서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고시에 응했다. 그러나 낙방소식이다. 그 이유는 너무 성적이 좋았다는 것이다. 양반계층에게 두려운 존재라는 것이다.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의사자격시험을 보았다. 합격증이 날아왔다. 그 합격증은 사람을 돌보는 자격증이 아니고 소나 개의 병을 돌보는 수의과 의사자격증이었다. 실망한 나는 노름판에 뛰어들었다. 돈을 많이 땄는데 나올 때는 빈 털털이가 되었다. 부호의 자식들이 노름밑천의 이자를 흠뻑 떼어 갔기 때문이다.” 그는 울분을 터뜨렸다. 막이 내리면서 불란서 사회를 풍자한 이 극을 본 관객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거리에서 데모를 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은 이미 피가로의 결혼에서 시작되었다”고 이 작품의 사회성과 정치성을 한마디로 대변했다.우리사회를 풍자하는 극작가와 위대한 작곡가의 합작으로 “피가로의 결혼"을 능가하는 혁명적 작품을 기대해 본다. 위대한 두 사람이 합작했으면 세계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작품이 나올만 한데 두 사람의 성격차로 합작품이 나오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베토벤과 괴테의 인간관계의 불협화음으로, 세계적인 작곡가와 시인의 작품이 또 하나의 ”피가로의 결혼“을 잉태하지 못한 안타까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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