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현장에서 -마돈나와 마릴린 몬로의 상대성
역사 속 현장에서 -마돈나와 마릴린 몬로의 상대성
  • 이달순 수원대명예교수 kmaeil@
  • 승인 2008.06.16 2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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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6월15일 마돈나로 잘 알려진 마돈나 루이스 치코네 리치는 미국의 미시간 주 베이시에서 태어났다. 1958년생이니까 그녀는 개띠이다. 도대체 무엇이 마돈나를 25년 동안 성공을 이끌었을까? 그는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팝가수 중 한명으로 기록된다. 그녀는 뉴스 미디어에 의하여 팝의 여왕으로 알려졌다. 마돈나는 모두 37곡을 빌보드 싱글 차트 10위안에 올린 최초의 가수가 됐다. 공동1위였던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를 추월한 것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 발레를 열망했고 무용가 앨빈 에일리스의 지도로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헤르난데즈의 댄스팀 멤버로 엔터테이먼트 산업에 데뷔한 그녀는 댄 길로이와 브렉퍼스트 클럽 밴드로 알려진 “팝 듀오”를 결성했다.초반에 밴드의 드럼을 연주한 마돈나는 그 클럽이 해체되기까지 전까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마돈나는 드러머 스티븐 브레이어와 두 번째 음악 그룹 “에미”를 결성하였다. 결국에 이러한 경력은 그룹에 홀로 남은 솔로음악가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그녀는 창조적인 스타일과 끝없는 변신을 통해 스스로에게 부단히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영화에 데뷔, 배우로서 인기를 끌어들었고 “육체의 증거”“그림자와 안개”등 무려 20여 개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녀는 무용수이자 가수이며 배우이자 모델이고 뮤직비디오 제작자이자 성공적인 여성사업가로 부단히 탈바꿈을 시도한다. 마돈나는 또 자신의 노래를 통해 성(性)과 인종과 계급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그녀는 첫 뮤직비디오 “경계선”에서부터 과감히 사회적 금기에 도전한다. 마돈나의 그러한 반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에이즈환자돕기운동, 여권운동, 동성연애 옹호운동, 열대림 보존운동 같은 정치적, 사회적 진보주의 운동들로 확대된다. 그의 화려한 사업을 천문학적 수입이 뒷받침 한다. 2007년에는 세계적 공연 프로미터 회사 라이브네이션과 10년간 1억 2백만달러의 공연계약을 맺었다. 포브스 닷컴에 의하면 마돈나는 2006년 6월부터 1년 동안 730억을 벌어 여가수 수입 1위였다. 마릴린 먼로는 1926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출생했다. 마돈나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스타라고 할 수 있겠다. 먼로는 어린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보냈다. 사진모델 시절 찍은 누두사진을 계기로 영화에 등장했다. 마돈나도 단돈 35달러를 들고 뉴욕에서 누드사진을 찍었고 삼류영화에도 출연했다. 마돈나와 달리 먼로는 50년대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가장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섹스심벌로 등장한 것이다.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 전신에서 발산하는 독특한 성적매력은 그녀를 순식간에 세계적인 섹시심벌로 올려놓았다. 마돈나는 무대에선 먼로 흉내냈지만 삶에서는 성실히 일했다. 그래서 지금 미국대학교 교양과목에 마돈나학이 학생들의 인기를 독점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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