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역사는 흐른다
[덕암칼럼] 역사는 흐른다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3.08.24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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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박문영 작사·작곡의 동요로 1991년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잡으시고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운니”라는 노랫말로 시작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그 위인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대단한 권력이나 막대한 부를 가진 사람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조선부터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위인들을 나열한 노래다.

반면 최근 대한민국 정치·경제·문화예술을 모두 찾아봐도 이같은 위인들이 또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연이어 터지는 부정부패도 한몫 했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나 대안 마련의 빛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은 자기 먹고 살기 급하고 살만한 사람은 각자의 이기심에 옆집도 돌아볼 여지가 없을뿐더러 각종 통계를 살펴보면 이게 사람 살만한 나라인가 싶을 만큼 참담한 현주소를 나타내고 있다.

물론 아무리 어려워도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했으니 과거 더 힘든 시기에도 잘 견뎌온 민족이 쉽게 무너지겠는가마는 꿈과 희망이 대폭 줄어든 것만큼은 사실이다. 오늘은 폭염의 끝자락에서 8월의 상처를 돌아보기로 한다.

먼저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인 경술국치.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통치한 시작일이다. 이날 나라를 팔아먹고 대대손손 잘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지난 22일 국회 본관에서 만나본 애국지사 후손이자 한국장수축구협회 김길문 회장은 여전히 가난한 분이었다.

조상들의 기운이 이어진 것인지 여전히 사익보다는 국익에 부합하는 마음으로 88세의 고령에도 눈빛은 청년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9월 1일 도쿄 등 간토 지방에서 일어난 규모 7.9의 간토대지진.

한국말로 관동대지진이라고도 불리는데 요코하마 도시 전체가 파괴될 만큼 대형 자연재해였다. 이런 자연재해조차 일본의 자경단은 있지도 않은 유언비어를 퍼트려 한국인 6천명과 중국인 800명을 살해했다.

국권이 없는 나라의 국민들이 꼼짝없이 겪어야 했던 암흑기였다. 그로부터 35년간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온갖 착취와 약탈의 난장판이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리저리 뜯기고 할퀴어진 상처들로 조선인들은 영구히 일본인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진 날들이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 한 해 전인 1944년 8월 23일은 ‘여자정신대근로령’을 발표한 날이다. 여자에게도 영장이 발부되어 1년간 근로동원에 응해야 했는데 이날로부터 약 20만 명의 한국 여성들이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 위안소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의 군인들을 상대로 성행위를 강요당한 시작일이다.

물론 돌아온 여자들은 극소수에 그쳤고 낯선 이국땅에서 망자가 된 여자들의 원혼은 그 누구도 챙겨줄 수 없는 게 약소국의 현실이었다. 필자는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있었던 일을 다시 되짚어 봄으로써 8월의 폭염이 우리 선조들에게는 더 뜨겁고 힘들었을 것이라는 추정에서 짚어본 것이다.

1년 뒤인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과 3일후인 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8월 15일 그토록 그리던 대한제국이 광복을 맞이했다. 하지만 일본의 악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에서 발생했던 불편한 진실을 감추기 위한 의문사들은 줄이어 발생했다. 1945년 8월 24일 돌아오지 않는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은 일본 북동부의 아오모리 현오미나토 항을 출항해 부산 항으로 항해 도중 돌연 방향을 틀어 교토 부마이즈루 항으로 기항하던 중에 폭발과 함께 침몰한 해상 사고였다.

기록에는 사고라지만 비공식 탑승 인원 약 8,000명 중에서 3,000명이 구조됐고 나머지 5,000명은 사망 또는 실종된 사건이었다. 35년간의 식민지 국가의 서러움을 견뎌내고 고국으로 향하던 첫 귀국선이었다.

이 사건은 현재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필자가 이렇듯 지난 한일관계를 재조명하는 것은 지금 세대들도 무관심한데 점차 잊힐까 하는 우려에서다. 이제 지난 일은 지난 것으로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여 한일관계를 재구성하자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여야의 입장이 양국의 견해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순진한 국민들을 갈라치기 하는 명분으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202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표심 획득의 이정표로 삼는다면 그 누가 하더라도 매국 행위다.

목표가 국익에 채널을 맞춰야지 당리당략으로 대처한다면 이는 당장은 몰라도 얼마 못 가서 국민들의 공분에 직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국민들이 호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국민의힘도 더불어민주당도 아닌 중립적 위치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한·미·일 공조체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물론 두 사건 모두 과거와 연관 짓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재의 과제를 풀려면 맞물린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후쿠시마 오염수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앞서 구체적인 설명을 남긴 바 국제적 전문가들의 판단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한국의 해양오염 사례와 비교해 볼 때 대처 방안이 앞뒤가 안 맞는 다는 것이다.

방사능 오염수보다 더 최악의 사건이었던 것은 시화호 방류였다. 1987년 착공되어 1994년 완공된 시화호는 필자도 수백 대의 토사와 암석을 덤프트럭으로 운반했던 대 공사였다. 완공 이후 반월공단·시화공단에서 배출한 폐수들이 시화호 전체를 검게 물들였을 때 언론에서는 인류가 낳은 재앙이라고 했다.

악취가 진동하고 어찌 해볼 수 없는 폐수를 시화호 완공 10년 만인 2004년 조력발전소를 착공, 2011년 8월부터 서해상으로 야금야금 배출하고 나서 살아 돌아온 시화호라고 구라를 친다.

그 방대한 양의 폐수들을 자연으로 보낼 때 시화호 바닥에 가라앉은 중금속 침전물부터 준설할 것을 주장했었다. 물론 지금처럼 되네 안 되네 하는 정치인도 없었고 당시 시화호에서 잡힌 물고기 중 살점에서 기름 냄새가 안 나는 고기가 별로 없었다.

말 안 해도 될 때 하는 것보다 말해야 할 때 하지 않은 죄가 더 크다. 비겁한 변명이라면 말해도 소용이 없던 시절이었고 바다에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그리고 우연일까 100년 전 이날은 대한제국이 식민지였지만 지금은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공동 대응으로 65분 동안 정상회담이 있었다.

뉴욕 타임즈는 미국외교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지정학적으로 중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위해 공들여 온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라는 내용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신냉전 화약고로 회담 성과를 평가했으며, 윤석열 정부의 무능과 일본의 국익만 있었다고 평가했다.

때마침 중국의 ‘난징의 강간’이라는 책이 저자 사망이후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앞서 한일간의 상처를 건드렸듯이 중일간의 아픔이 드러나는 책이었다. 최근 미국과 중국이 대만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칫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전 세계의 체제가 다른 나라들의 대리전처럼 한·미·일 연합이 대만과 중국의 불편한 진실을 대신할 대리전으로 남북이 붙는다면 이는 더욱 큰 불행이다. 역사는 흐른다. 위인들의 등장이 절실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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