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칼럼] 같은 민족 다른 국민
[덕암칼럼] 같은 민족 다른 국민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kyunsik@daum.net
  • 승인 2023.10.05 08: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오늘은 한국인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높이고 재외 한인의 권익 신장과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로 매년 10월 5일 정해진 ‘세계 한인의 날’이다.

지난 2007년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으며 이날을 전후한 개천절과 한글날 사이의 주간을 재외동포주간으로 기념하고 있다.

시골 동네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간 것이나 한국에 살다가 해외로 이사를 간 것이나 별반 다를 바 없지만 관광비자 내지 취업으로 잠시 가는 게 아니라 아예 이주했다면 도착한 국가의 국민이 되는 것이고 그 나라에 세금을 내야한다.

즉, 국적으로 보자면 외국인이다. 물론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이름도 말도 글도 한국인이었음은 당연하겠지만 외국인 이라는 것은 현실이다. 이미 한인의 해외 이주는 1860년대부터 1910년 사이로, 구한말의 농민과 노동자들이 빈곤과 압정을 피해서 중국, 러시아, 하와이, 멕시코, 쿠바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한마디로 죽지 못해 간 것이며, 두 번째 시기는 일제강점기의 수탈을 피해 농민과 노동자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다시 늘어났다. 이 때도 식민지를 벗어나고자 자국의 땅을 떠났으므로 설레거나 뿌듯한 출국은 아니었다.

가는 길도 지금처럼 항공기에 몸을 실어 한번에 가는 게 아니라 만주로 돌고 돌아 도보로 다녔으니 그 참담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물론 도착한 이방국에서도 나라를 잃고 찾아온 황색인종을 환영할리는 없는 것이니 말이 재외동포지 정착과정에서 겪어야 할 어려움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일이다.

재외 한국인의 세 번째 출국 시기는 1945년부터 1962년 사이로, 전쟁고아의 입양, 유학생, 외국인과의 혼인 등으로 대부분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주했는데, 지금도 입양아들의 부모 찾기나 혈육에 대한 회귀본능은 왜 나를 버렸냐는 질문에 답을 못하는 벙어리 부모들이 많은 것이다.

끝으로 네 번째 시기는 정부 차원의 이민정책이 수립된 1962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인데, 도착 국가의 조건에 맞는 투자 이민이나 기타 사업상 정착을 하려는 국민들이 늘어났다.

이들이 해당 국가의 정착과정에 필연적 단합의 이유를 체험하면서 1997년 재외동포재단을 설립하고 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재외국민의 투표권이 인정되어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한 유권자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됐다.

호적을 옮기듯 국적을 옮겼다면 모르겠지만 한국인들의 해외진출은 이제 어색하거나 대단한 일이 아니게 됐다. 살기 위해 떠났고 국권을 잃어 그 추운 날 만주벌판을 지나 낯선 곳으로 향했다.

이제 한국인들의 억척같은 생활력과 정착과정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서러움, 그리고 보란 듯이 기적처럼 일어나 한인사회를 구축하는 지혜와 용기를 보면서 오늘 만큼은 이들에게 찬사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각자도생의 길은 다르다. 필자가 찾아보았던 브라질 상파울루의 한인사회나 미국 뉴저지 한인사회의 경우 나름 경제적으로 치열한 공방 속에 애쓰며 살고 있지만 이들 또한 사람사는 곳은 대동소이하다.

고향땅을 떠나 도시로 이사 간 사람들이 모두 잘 살수 없듯이 한국을 떠나 타국으로 간 사람들이 모두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디가나 텃세라는 게 있는 것이고 평소 괜찮다가도 문제가 발생하면 달리 피할 방법이 없어 LA 한인교포들이 비극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한 서러움은 중국의 조선족, 동남아시아 외국인 근로자들이 한국 땅에 정착하기까지 겪었던 일들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도 외국인이라면 환대하던 정책적 배려와 한국인들 특유의 손님맞이 정서가 있었던 반면 외국인이라고 천대하며 임금착취와 인권유린의 사례가 많았다.

한국을 떠나 미국, 일본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떠났던 이들 중에는 자신만이 간직한 숱한 사연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낯선 곳에 대한 이국적 신비보다는 그들로부터 겪은 일들, 원치 않았던 사건들에 대해 감내 해야할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스스로 좋아서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상황에 따라 이꼴 저꼴 보기 싫어 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한국정서를 못 이기거나 꿈을 펼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떠난 사람들도 많았다.

한때 국권을 상실해 망명정부로 해외동포들의 십시일반으로 지켜왔던 ‘대한국혼’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해외 각국에서 나름대로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이들이 한국인임은 부인할 수 없다.

비록 세금은 해당 국가에 내더라도 혈통이 달라지진 않는다. 필자의 성장환경은 탄광촌 태백이었다. 자연스럽게 알게 된 서독 파견 광부들의 이야기인데, 낯선 나라에서 척박한 작업 환경 속에 버티다가 명절이면 오도가도 못 하는 타국에서 한국이 참으로 그리웠다고 들었다.

아리랑 노래만 들어도 눈물을 참기 어려웠던 당시의 무용담을 듣노라면 청소년이었던 필자의 기억 속에 가난한 나라의 서러움이 얼마나 큰지 체감할 수 있었다. 그 기억은 40년이 지난 2006년부터 경기도 안산에서 개최한외국인들을 위한 추석명절 위안공연의 시발점이 됐다.

해마다 추석이면 많은 시민들과 가난하다는 이유로 낯선 한국땅에서 고생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해 ‘마음만은 고향으로’라는 슬로건으로 동남아시아 가수와 음악을 준비했었다. 수년 간 공연이 성황리에 이어지자 이를 시기·질투하는 특정인들의 모함으로 중단됐지만 지금 돌아봐도 흐뭇한 기억중 하나다.

그리고 약 10년 전부터 7년간 한국소식을 미국 뉴욕과 뉴저지 한인사회에 라디오를 통해 전달한 적이 있었다. 동네 징검다리가 콘크리트 다리로 바뀐 사연이나 어느 마을에 송아지가 쌍둥이를 출산한 이야기, 시골마을 이장님 취임식부터 어느 해변가의 노을이 아름다운지를 소소하게 전하는 라디오 MC는 매주 5회씩 오랜 기간 이어졌다.

지구 반대편이 아침시간이면 채널을 고정시키는 동포들이 늘어갔다. 이 또한 어느 시점에 중단되었지만 재외 한국인들의 삶이 보다 더 개선되고 그들의 마음속에 한국을 잊지 않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어쨌거나 한국 땅에서 대한민국 정부에 세금내고 있는 분들은 행복한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