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李茂)장군과 석성(石星)상서의 쾌거
이무(李茂)장군과 석성(石星)상서의 쾌거
  • 이학근 논설위원 kmaeil@
  • 승인 2007.06.28 1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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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이씨 시조 이무 장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때 신라를 도와주고 변안배과 연안후 작위를 받고 통일신라 황해도 변안땅에 귀착해 신라국에 귀화한 당나라 고종 황제의 당숙벌 되는 항족 장군이고, 석성 상서는 명나라 신종황제 때 병부상서로서 조선왕조 최대 위난 임진왜란 때 이예송 장군으로 하여금 조선족을 도와 왜군을 물리치게한 공로가 있는 상서 였는데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나고 만주에서 청나라가 일어낫을때 임진왜란 때 조선파병주장으로 국력을 소진 시켰다고 역적으로 몰려 옥중에 잇을때 그의 가족을 조선국으로 망명시켜 황해도 해주에서 살다가 다시 남하해 성주에서 후손이 살았을때 해주, 및 성주 석시 시조로 삼는분이다.
연안이씨 시조 이무장군은 660년 당나라 소정방 이대총관이 되고 이무는 부총관겸 독군(군사 감독관)이 되어 13만 당나라 대군을 인솔해 지금의 덕적도와 지벌포를 들어와 신라의 김유신 장군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같이 백제의 수도 부소성(부여)를 칠때 소정방과 김유신 장군관의 주도권 분쟁이 있을때 조정화해 시켰고 백제를 점령한후 독단으로 백제를 식민통치하면서 동맹국인 신라마저 공격할때는 소정방을 사전저지시키고 나당관계를 원만이 이끌어 준 공로로 660년8월25일 신라국에서 연안백 작위와 귀빈대우를 받고 다시 668년 9월15일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 평양성 함락시키고 삼국통일때는 신라국 대장군 김유신장군의 추천으로 연악백에서 한등급올려서 직위가 높은 연안후 작위와 연안지방 1000호 식읍을 받고 나서 당고종이룩고 고종외 무후가 정권을 장악하자 귀축치 않고 신라국에 귀하해 신라국 삼국통일을 도와 준 콰거는 그후손들이 황해도 연안땅 세거하고 역사상에 충신만 배출한 조선의 8대 명문집안이 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시절 초대의 정원의장이 신독립 투사 이동녕 선생은 이무장군의 후예이다.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 상서는 정묘보서에 의하면 그세손 석담이 부친(석성)의 유언에 따라 중국요동을 거처 조선황해도 해주에 이르러 그곳을 살다가 아들인 석귀상이 조카 석난과 함께 해주로 부터 남하해 지금의 경남 산청군 생초면에 속해 있는 산음현 모효리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한편 석담보다 조선땅에 먼저 도착한 석성상서의 아들 석재면은 경북 성주대명동에 이르렀고 아들대에 석구화가 성주를 떠나 청풍풍기땅에 후손들이 경남산청 함양 경기도 고양 충북제천 영산 강원도 정선 충남아산 신창에 세거해 온것으로 본다.
해주석씨 성주석씨 시조 이신 석성 명나라 병부상서가 임진왜란때 명나라 조정에서 다른 댓니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도와 파병한것은 석성의 처가 그의 아버지 지방관리로서 국고를 축내였다고 처벌을 받아 옥중에서 옥사하자 장례치를 돈이 없어 처녀로서 리방에서 천냥돈으로 몸을 팔겠다는 것을 명나라 사절 통역관으로 따라 갔다가 딱한사정을 듣고 그 빚을 갚아주고 풀어준 그 처녀가 석성의 처가 되어 그때 조선 통역관 홍순언의 은혜를 값고저 청병사절로 명나라를 찾아온 홍순언을 도와주어 임진왜란때 조선에 이예송등 명원군 10만명을 파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석성상서의 처의 간청에의거 이루어졌고 석성의 유언에 따라그의 처는 자식들을 데리고 조선에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는 드라마틱한 사실이 역사를 전환시켰고 이무장군에 대하여는 김유신 장군일대기인 각간 선생일기에 실려있고 '이무장군의 삼국통일'(이학근 작 우리일보 2005년 연재)상세히 기술되었고, 석성 병부상서의 행적은 kbs역사스페셜과 동천실기에 적혀있다.
이무장군과 석성 상서는 어쩌면 삼국통일과 조선 역사를 전환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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