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을 맞는 폭거의 말로
비운을 맞는 폭거의 말로
  • 박호양논설위원 kmaeil@
  • 승인 2007.07.01 2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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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의 역사적 인물 가운데 포악한 정치를 해 온 사람이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종의 맏아들인 폭군 연산군을 떠오르게 한다. 연산군은 성품이 워낙 포악한데다가 즉위후 폐비 윤씨의 생모가 성종의 후궁 정씨. 엄씨의 모함으로 내 쫒겨 사사(賜死)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정씨의 소생인 안양군(安陽君). 봉안군(鳳安君)을 살해하기도 했다. 원한에 사모친 어머니를 대리한 복수극이다. 또한 유교의 교육을 맡아보던 이조 당시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에서 경학(經學)을 연구하고 배움의 전당인 성균관의 유교생들을 내쫒고 그곳을 유흥장으로 만들어 전국에서 징발해 온 미녀와 양마들과 놀아나기도 했다. 부처의 완전한 깨달음을 주는 원각사(圓覺寺)는 기생양성소(妓生養成所)가 되었다.
 전국에 있는 민간인 여자들을 함부로 잡아들이고 연산군 폭정을 공박하는 투서가 국문으로 되었다하여 국문을 아는 자는 모조리 잡아드리며 한글서적을 모두 불에 태워버리고 국문쇠퇴(國文衰退)를 초래케 한 폭군이었다.
 폭군의 대명사처럼 불리우고 있는 은(殷)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걸주(桀紂)도 예외될 수 없는 인물이다. 백성들은 죽든 말든 안중에도 없다.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이루는 주지육림(酒池肉林)에 음란무도한 생활을 해온 인물이다. 그는 구변이 좋았고 몸이 날랬다. 보는 눈과 듣는 귀는 남보다 이해력이 빨랐다.
 힘도 장사여서 손으로 맹수를 잡아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지혜는 간하는 말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었고 그의 구변은 자기의 그릇된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화술을 가지고도 있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자기가 휼륭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자기의 위대한 이름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을 우쭐대기도 했다.
 그는 술을 좋아하고 또 여자를  가까이 했다. 특히 달기(疸氣)라는 여자를 사랑해서 그녀의 말이라면 들어 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여자에게 큰 유원지와 별궁을 지어주고 많은 들짐승과 거기에 놓아기르기도 했다. 남녀가 벌거벗고 그 사이를 서로 쫓고 쫓기고하며 밤낮 없이 계속 술을 퍼 마시고 즐겼다.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제후들 중에 폭정에 불만을 가지고 배반하는 사람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그러자 그는 형벌을 무섭게 하여 이를 막을 생각으로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려는데 골몰하기도 한다. 드디어 그는 포락지형(?烙之刑)이란 법안을 창안했다.
 이 뜻은 불에 달군 쇠기둥을 맨발로 건너게 하는 형벌로 매우 가혹한 극형을 의미하고 있다. 술과 고기를 진탕 마시고 먹고하며 멋대로 놀아나는 폭거군주정권(暴擧君主政權)을 연장하려는 간악한 법령을 선포하여 백성들의 입을 틀어막고 반항하고 역모하는자를 없애자는데 있다.
 연산군의 악정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가는 꼴을 보다못한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등은 목숨을 내걸고 주동이 되어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이루어져 연산군을 내쫒고 말았다.  탐욕과 포악하면서 구슬로 꾸민 궁전을 만들어 백성들의 재물를 착취하고 고갈시켜 온 폭군으로 대명사가 붙어 있는 걸주의 정권말로도 비운으로 막을 내렸다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백성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어질고 훌륭한 성군(聖君)이 우리 곁에 있어 주기를 원하고 있다.
 성군뿐만이 아니라 지위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넓은  아량으로 포용하는 미덕을 발휘 할 때 독재폭정의 벽은 허물어지고 인간평등의 문이 활짝 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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